소치 동계 올림픽이 막이 올랐다. 겨울 내내 아이들과 스케이트장, 눈썰매장도 갈 여유가 없었던 우리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스마트 폰 실시간 소식에 시선을 멈춘다. 그간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몇몇 선수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들의 선전 혹은 실수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땀이 선수 자신의 기량으로 정직하게 돌아오는 것이 스포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자 역시 운동을 하는 것,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진 않을 듯하다.
소수만 키워내고 승자만 누리는 시스템
하지만 인간적 ‘감동’을 자아내는 그들의 노력 ‘과정’은 ‘결과’에 의해서 과장되거나 퇴색되기 십상이다. 국민 누이, 국민 남동생의 이름으로 ‘모두의 바람’이라는 짐을 짊어진 선수들은 그나마 행운일 수도 있다. 국민의 ‘기대’를 받도록 선택되었으며, 그 선택조차 받지 못한 선수들은 여전히 선택받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회균등의 문제, 승자만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어있는 구조적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고르게 양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특정한 선수를 단기필마로 키워내는 시스템은 점점 더 고착화 되어간다. 스포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현상은 만연하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자신들 스스로가 ‘엘리트주의’에 무젖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나 국가 전체, 대중을 이끌어나간다는 사고는 계급사회에서 가장 환영받았던 공식이다. 10% 미만의 기득권은 상상만 해도 달콤하다. 따라서 전통시대에는 신분제를 통해 ‘배움’의 권리를 주고 빼앗는 것이 기득권 유지를 위한 관건이 되었다. 능력 있는 인물들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면 그보다 더 명쾌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는 참으로 낭만적 상상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허생(許生)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을 섬에서 모두 데리고 나왔겠는가. ‘지식’이라는 것은 10% 미만의 양반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자 권력이었고, 그래서 지식이 특권이었던 시대였다.
진정한 리더라면 그 특권 밖에 자리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조망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기득권에서 배제된 다수의 가치도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잠재적 가치에 주목하고 끌어낼 수 없나
실학자들의 가장 큰 특장이 바로 이러한 안목(眼目)이다. 성호와 연암, 다산 모두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 기득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들과 교유한 서얼이나 중인들은 제도적으로 막혀있던 자신의 잠재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은 『청성잡기』에서 조선의 실용서를 지은 서얼 출신과 중인출신 지식인들을 열거하면서 “우리나라의 실용서는 대부분 미천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라 하였다.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한교의 《무예제보(武藝諸譜)》 등을 예를 들기도 하였고, 《삼운성휘(三韻聲彙)》를 완성한 중인 정충언(鄭忠彦)이 그 공로를 홍계희(洪啓禧)에게 빼앗긴 억울한 사례도 소개했다.
대학의 서열화는 모든 공(公)·사(私)교육 현장에 ‘엘리트주의’를 재촉한다. 이러한 무한경쟁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교수자, 학생, 학부모 모두는 일종의 피해자가 아닐까. 몇 번의 정권 교체를 겪으면서 ‘중산층의 확대’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물질과 기득권이 함께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곧 ‘물질적 중산층’의 확대라는 말과도 통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배제된 채 가시적인 성과가 중요시되는 현상을 낳기도 한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똑같이 땀 흘리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선수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이들에게서도 ‘성공’, ‘1등’에 못지않은 가치를 자연스레 발견하는 ‘정신적 중산층’이 확대되었으면 하는 것은 꿈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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