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과 화성, 그리고 산성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지만, 읍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읍성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등장했지만,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 군현의 소재지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삼남 지방에 많았는데, 중종대에는 160개, 영조대에는 107개가 있었다고 한다. 읍성 안에는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 열리거나 중앙에서 내려온 관헌이 묵는 객사, 군수와 현감 등 수령이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동헌, 지방의 향리들이 근무하는 여러 관아 건물, 그리고 상인이나 농민들이 사는 일반 가옥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성 밖의 동족 마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성 안에는 살지 않았다.
서양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읍성
대한제국기에 한국에 온 서양인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서양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름 아닌 읍성이었다. 한 서양인은 여행기에서 평양성의 성벽 위에 올라서니 성안에 ‘머쉬룸’(버섯)이 가득했다고 쓰고 있다. 읍성 안의 건물들 가운데 객사・동헌・관아만 기와집이고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그의 눈에는 초가집들이 버섯의 무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읍성이 전국에 100여 개가 있었으니, 10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성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이들 읍성을 그린 각 군현의 지도가 잘 남아 있다. 이를 보면 읍성의 모양은 사각형의 것도 있고, 원형의 것도 있었으며, 완전히 평지에 지어진 것도 있고, 뒤쪽으로 야트막한 산을 끼고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과 그 위의 문루,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치(雉)와 같은 여러 시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읍성들은 1910년대에 대부분 훼철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 밀려온 일본인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읍성은 이들이 성내로 진출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신작로를 만든다는 구실을 내세워 성벽을 훼철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 밖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인들은 성벽이 헐리자 바로 읍내로 진출하여 읍내의 주요 시가지를 장악하였고, 이곳에 이른바 혼마치(本町)니 긴자(銀座)니 하는 이름들을 붙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읍내에 있던 객사, 동헌, 관아 건물들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군청 사무실로 썼고, 규모가 작고 낡은 것은 철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각종 공공기관 건물을 새로 세우거나 기관장들의 관사를 지었다. 특히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인 객사는 규모가 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철거하였다.
‘성의 나라’ 흔적, 일제가 지운 것 우리가 되살려야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폐성령(廢城令)’을 내려 옛 번(藩)의 중심지에 남아 있던 성과, 성 안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었던 천수각을 대부분 철거하였다. 이는 옛 번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270여개 번의 천수각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60여 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그 이후 전쟁 등으로 훼손되어 현재 남아 있는 메이지유신 이전의 천수각은 12개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도 대한제국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서울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을 훼손하고 도성을 철거하였으며, 각 지방에서는 읍성과 객사, 동헌 건물 등을 훼철하였다.
현재 읍성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은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정도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곳은 상당히 많다. 비인, 해미, 남포, 보령, 동래, 보령, 진도, 장흥, 경주, 거제, 홍주, 언양, 대정 등이 그런 곳이다. 그리고 밀양, 동래, 청주 등지에서는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읍성은 원형과 너무 다르게 복원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성의 나라, 한국’은 그리 쉽게 복원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성의 나라였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부분적으로라도 복원이 가능한 경우에는 복원을 하되, 충분한 자료조사와 발굴조사를 거친 뒤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복원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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