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등용과 낙하산 인사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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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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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3, 2014, 12:59:48 PM2/23/14
to 임채일

- 제 804 회 -

인재 등용과 낙하산 인사

 

  요·순시대의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동양의 유학자들이 꿈꾸던 가장 큰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순시대가 지나간 이후, 참다운 요·순시대의 정치를 복원해내지 못했던 것이 동양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순시대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요순정치의 핵심은 인재를 제대로 길러 올바르게 등용하는 일인 ‘용인(用人)’이 그 첫째요, 두 번째는 국부(國富)를 증진하여 국민들이 유족하게 살아가게 하는 ‘이재(理財)’에 있었습니다. 결국 인재 등용에 실패했고, 국부증진인 이재에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로 요·순시대는 오지 않고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로 보면 두 차례 요순 정치에 근접하려던 시도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양성을 큰 목표로 삼았고, 정조대왕이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분에 차별 없이 우수한 인재를 육성해냈던 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학자 군주 정조에 의하여 발탁되었고, 규장각에 들어가 갈고닦은 능력과 지혜로 정조를 보필하여 정조치세의 훌륭한 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의 인재 등용이라는 올바른 통치에서 그래도 조선왕조의 기틀이 잡혔고, 정조의 4색 당파에서 능력 위주로 고른 인재 등용정책으로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00년 뜻밖에 49세의 왕성한 나이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극보수의 정권이 들어서자 1801년 ‘신유옥사’를 거치며 정조시대에 양성되었던 인재들이 퇴출되면서 마침내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신유옥사에서 천주교도가 아닌 사람들조차, 정권의 반대편이라는 이유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정조의 신하들 운명에서 그런 비극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산산문선』(2013, 창비)에 실린 「종두설(種痘設)」이라는 글에, “이해(1800년) 6월에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다음해(1801년) 봄에는 내가 장기로 유배당하고 초정 박제가도 경원(慶源)으로 귀양갔으며, 의원 이씨(李氏)도 자기 진영의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고 무고하게 고문을 당해 죽게 되니 마침내 마마 종자가 끊어지고 말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마라는 악성 전염병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시절에, 정약용과 박제가는 공동연구를 통해 종두술(種痘術)을 개발하는 과학적 성공을 거두고, 의원 이씨로 하여 시술하게 하자, 대부분의 환자가 모두 살아나는 획기적인 질병 치료가 이뤄지던 때인데, 그런 의학의 인재들인데도 집권자들의 견해와 다른 사람이라는 이유로 배척받아 파멸하던 실상을 다산이 폭로했던 것입니다.

  그런 유능한 의학자들까지 퇴출하던 세상, 그렇게 인재를 아낄 줄 모르고서 어떻게 나라가 바르게 가겠는가요. 요즘도 인재 등용은 야만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른바 ‘낙하산’이 판을 치는 인사정책이 성행하면서 자질도, 능력도, 경험이나 경력도 무시하고 자기 진영의 인사들만 곳곳에 배치시키는 인사가 계속되고 있으니,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요. 요순은 아니더라도 세종과 정조의 본을 받아서라도 인재 등용다운 인사정책이 시행된다면 어떨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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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석무
· (사)다산연구소 이사장
· 고산서원 원장
· 성균관대 석좌교수

· 저서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역주), 창비
           『다산 산문선』(역주), 창비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조선의 의인들』, 한길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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