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회색빛 으로 여는 아침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남 교수님과 꼽추 사모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위력을 잘 나타내 줍니다.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과장이 아닙니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난하는 말과 정죄하는 말은 사람을 죽이는 말입니다.
자신만의 입장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말도 사람을 죽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도 사람을 죽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칭찬하는 말도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희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말도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우리가 입이 있어서 말을 꼭 해야 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얼굴의 아름다움보다 언어의 아름다움이 훨씬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전도사로 있었을 때 담임목사님으로 계시던 K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신학교에 다닐 때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멋있게 생겨서
여학생들에게 특별히 인기가 많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의 사모님은 꼽추였습니다. 미남 교수님과 꼽추 사모님의 러브스토리!
무슨 소설에나 나올만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이 두 분은 신학교에 다닐 때 동급생이었는데 이 두 분의 러브스토리는 당시 신학교 학생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남 교수님이 애걸 복걸을 해서 꼽추 사모님에게 프로포즈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꼽추 처녀에게는 항상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꼽추 처녀가 가는 곳마다 기쁨이 있었고, 상처 입은 신학생들이
이 처녀의 따뜻한 말에 항상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신학생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점심때만 되면 식사를 하지 못하고 기도실로 들어가는 신학생들도 많이 있었고,풀밭에 앉아 그냥 예수님을 묵상하는 신학생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꼽추 여인이 다가가서 그 신학생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항상 동료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많은 신학생들이 삶의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신학생들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한들 이 꼽추 여인이 당하는 고통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술에서는 항상 아름다운 언어가 흘러나왔고
그 언어가 사람들에게 소생하는 힘을 주었습니다.
이 꼽추 처녀는 비록 추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녀에게는 아름다운 언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언어는 추한 외모를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남학생들로부터 가장 인기 있는 존재가 되었고 가장 멋있는 남학생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결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을 세워 주는 삶을 살고, 언어생활에서 사람을 세워 주는 언어를 가지는 것!
그것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고 사람을 진정한 성공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름다운 언어로 향기 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피곤해 보일 때 우리는 무심코 피곤해 보여요. 어디 아파요 합니다
그러면 더 피곤하고 더 아프답니다
이럴 때 상대방의 어느 장점을 이야기 합니다
인생성공의 333법칙이 있습니다
하루 3명에게 3초간 3번의 칭찬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3년하면 성공(?)합니다
감사합니다. 멋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멋져 보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너무 예뻐보입니다,, 등등
자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하시지요...
아참
그림 첨부합니다
어떤 모형도 인데 정답을 맞추시면 월남국수 진하게 쏘겠습니다.(참고로 성경에 있습니다)
주님만 기대합니다
<모형도.jpg>
여리고(Jericho)’ 라는 지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 나팔소리, 무너지는 성벽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믿음과 승리의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까? 회의론자들은 아니라고 말하며, 단지 여리고의 유적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의 주된 이유는 1950년대에 영국의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이 지휘하여 수행한 현장발굴의 결과 때문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
”이스라엘 민족의 공격이 있었음에 틀림없는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에 도시성벽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발굴에서 여호수아서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기술되어있는 여리고 성벽의 파괴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1]
캐슬린 케년의 발굴 보고서를 편집하고 공동 저술했던 토마스 홀란드(Thomas A. Holland)는 나타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군사적 정복설과 후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에 대한 참고자료들을 가지고 캐슬린 케년이 내린 결론은, 청동기 말기(ca. 1400 BC)에 도시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고고학적 자료도 없다는 것이다” [2]
그러나 금세기 동안 계속 수집되어온 고고학적 증거들을 주의 깊게 조사해보면, 이것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요새였던 여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그들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성벽이 하늘에 닿는 큰 성읍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명기 9:1). 케년의 세심한 조사는 여리고가 정말로 강력하게 요새화되었고 그것이 불탔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그 유적들의 연대를 잘못 추정한 결과, 고고학적 발견과 성경의 기록이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녀는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성은 BC 1550년 경에 이집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증거물들을 더 심층 분석해 본 결과, 파괴는 BC 1400년 경에 (후기 청동기 1기 말에) 발생했고, 이것은 성경에서의 정복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3]
여리고 성이 있던 구릉(mound or tell)은 아래쪽에 돌로 된 옹벽(retaining wall, 기초성벽)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토벽(earthen rampart)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옹벽은 무려 4-5m (12-15 feet)의 높이에 달했다. 이 옹벽 위로 폭 2m, 높이 6-8m의 진흙벽돌로 된 성벽(mudbrick wall, 외벽)이 있었다.[4] 이 진흙벽돌의 제방(둑, embankment) 위로는 유사한 진흙벽돌로 된 성벽(내벽)이 있었는데, 그 내벽의 기저부위는 외벽의 바깥쪽 땅에 비해서 14m나 높았다 (그림 참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7일 동안 매일 성 주위를 돌면서 행진할 때 그들 위에 아스라이 보였던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의 이 굳건한 요새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벽 안쪽의 도시 면적은 약 6 에이커(환산하면 약 200m x 120m) 정도이지만, 안쪽 도시와 요새화 된 성벽들이 차지하는 면적들을 다 합하면, 전체 면적은 50%가 더 넓어져서 약 9 에이커 정도가 된다.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에이커 당 200명을 기준으로 하면, 상부 도시의 인구는 대략 1,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세기초 독일 팀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외벽과 내벽 사이의 제방에서도 살았다. 또한, 성 주변의 마을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도 성 안으로 피난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공격했을 때 수천 명이 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너진 성벽
여리고 성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위에 대해 잘 대비하고 있었다. 고대는 물론이었고 현재에도 여리고 성내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성벽 안쪽에 있다. 공격 시점은 수확이 막 끝난 시기였으므로(여호수아 3:15), 그들은 충분한 식량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0년대에 존 가스탕(John Garstang)의 발굴 자료와 또한 캐슬린 케년의 발굴에서, 가나안 인들의 집들에서 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들이 발견된 사실로도 입증이 된다. 풍부한 식량 공급과 충분한 물이 있었으므로, 여리고 백성들은 아마 몇 년 동안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7일째에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난 후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로 기록되어있다 (여호수아 6:20). 여기서 히브리어의 의미는 성벽이 ”성벽 아래로 무너졌다 (fell beneath itself)”는 뜻을 가지고 있다.[5] 여리고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여리고 성이 종말을 맞았을 때, 진흙벽돌 성벽이 무너져 내려서 외벽의 아래 부분에 쌓여졌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케년의 조사는 가장 상세한 것이었다. 성이 있던 구릉의 서쪽 부분에서 그녀는, 외벽의 거의 꼭대기에 쌓여있었던 붉은 진흙벽돌들이 외벽의 기저부에 떨어져서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아마도 제방의 정상부 또는 외벽 위쪽의 진흙벽돌들이 무너져 내림으로서 쌓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6]
바꾸어 말하면, 케년은 성벽이 무너져 내려 쌓인 벽돌더미를 발견한 것이었다! 1997년에 성이 있던 구릉의 남쪽 끝에서 발굴 작업을 한 이탈리아 팀도 정확하게 같은 것을 발견했다.
바꾸어 말하면, 케년은 성벽이 무너져 내려 쌓인 벽돌더미를 발견한 것이었다! 1997년에 성이 있던 구릉의 남쪽 끝에서 발굴 작업을 한 이탈리아 팀도 정확하게 같은 것을 발견했다.
성경에 따르면, 라합(Rahab)의 집은 요새화된 성벽의 일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여호수아 2:15). 만일 성벽이 무너졌다면, 라합의 집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그녀의 가족들을 그녀의 집안으로 대피시키면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구조되었다 (여호수아 2:12-21, 6:17,22-23). 여리고 성의 둔덕 북쪽 끝에서 고고학자들은 라합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했다.
1907-1909년의 독일팀의 발굴결과를 근거로 한 고대 여리고 북편 성벽의 추정도. 가옥들이 돌로 된 옹벽 위에 놓여져 있는 진흙벽돌 성벽을 의지하여 지어졌음에 유의하라. 성경은 라합의 집이 성벽을 대하고 지어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2:15).
1907-1909 년 독일팀의 발굴에서, 북쪽 성벽의 짧은 구간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무너지지 않았음이 발견되었다. 그 진흙벽돌 성벽의 일부분은 아직도 2m 이상의 높이로 서 있었다.[4] 더구나 이 성벽에 잇대어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이곳에 라합의 집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7] 성벽이 집의 후면 벽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정탐꾼은 쉽게 도주할 수 있었다. 도시의 북쪽인 이 위치로부터 정탐꾼이 3일간 숨어있었던(여호수아 2:16,22) 유대 광야의 산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위쪽의 내벽과 아래쪽의 외벽 사이의 제방에 위치한 이곳은, 전쟁이 났을 때는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므로, 집값이 쌌을 것이다. 이 지역은 도시 내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지역으로, 아마도 빈민촌이었을 것이다.
성벽이 무너지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5m 높이의 하부 옹벽을 넘어갈 수 있었을까? 발굴결과에 의하면 무너져 내린 외벽의 진흙벽돌들이 옹벽 옆에 쌓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ramp)를 형성했던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시에 들어갔던 방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즉, 똑바로 위로 넘어서, straight up and over)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여호수아 6:20). 이스라엘 백성은 올라가야만 했고(go up), 그것이 바로 고고학이 밝혀낸 것이다. 그들은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 구릉의 바닥 부분인 지상에서 방어벽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여호수아 6:5절)).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박사가 1997년에 여리고 성의 남쪽 끝에서 이탈리아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돌로 된 외벽의 기초부분(옹벽)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6장에 설명된 바와 같이 성을 공격했을 때 이 외벽 주위를 행진했다.
화재에 의한 파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여호수아 6:24). 다시 한번 고고학적 발견은 이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파괴된 성의 동편 일부분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어디에서든 발굴이 일정 깊이에 도달하면 1m (3 feet) 정도 두께의 재와 불에 탄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케년은 이 철처한 파괴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파괴는 철저했다. 벽과 바닥(floors)들은 화재로 인해 검거나 붉게 타 있었고, 방마다 쏟아진 벽돌, 목재들, 가재 집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의 방에 떨어져있는 파손된 잔해들은 심하게 불탔지만 동쪽 방들의 벽들은 화재의 영향을 받기 전에 붕괴되었던 것처럼 보인다.”[8]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불에 의해서 파괴된 곡물로 가득한(full of grain) 많은 저장 항아리(storage jars)들을 발견했다. 이것은 고고학적 기록에서 매우 특별한 발견이다. 곡물은 단지 식품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곡물과 같은 귀중품은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는 법이다. 여리고에서는 왜 곡물이 그대로 남겨져 있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 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여호와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여호수아 6:17)
여리고에 남아 있어서 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곡물은 35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아간(Achan)만이 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대로 아이(Ai) 성에서의 참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많은 곡물들을 손대지 않고 남겨둔 것은 성서기록의 또 다른 면의 진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풍부한 식량과 물의 공급이 있고 강력하게 요새화된 성을 정복하는 데에는 통상 몇 달, 심지어는 몇 해가 걸릴 것이다. 성경은 여리고가 단지 7일 후에 함락되었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폐허에서 발견된 곡물 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음은 성 안의 백성들이 곡물을 거의 소비하지 않았고, 포위기간이 짧았던 것을 나타낸다.
여리고의 교훈
고고학과 성경 사이의 외견상 불일치 때문에, 여리고는 한때 성경속의 이야기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정확한 해석을 했을 때에는 바로 정반대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모든 세부사항에서 성경의 기록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고고학적 발견은 여리고 성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하였던 것이다.
여리고의 성벽이 어떻게 무너졌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도시가 종말을 맞았을 때에 지진(earthquake)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지진을 사용하셨더라도, 지진이 필요한 정확한 시점에 일어났고, 라합의 집을 보호했던 것은 여전히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벽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백성들이 7일 동안 성벽 주위를 행진하고 난 후에, 여리고의 벽은 믿음으로 인해 무너졌던 것이다 (히브리서 11:30).
여리고는 세속적 학문의 결과가 성경과 일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성경의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영적 교훈이 되고 있다. 우리도 때로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요새와 같은 성벽에 직면하곤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great and mighty things)을 행하셔서(예레미야 33:3)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