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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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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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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1, 2007, 11:24:42 PM10/11/07
to
서자(庶子.서얼.庶孼)

서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의 소생을 이르는 말. 서얼(양반의 첩 자손)의
차별은 1415년(태종 15)에 과거 문과 응시를 금지한 데서 비롯된다. 조선초
서류(庶類)인 정도전이 난을 일으킨 것이 서류(庶流) 등용 폐지 이유이다.

연산군 때 서류인 ‘유자광의 난’을 당하게 되자 적서 차별 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상속권이 없고 호부호형을 못하고 무과에 한해 과거를 볼 수
있었으나 관직의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제도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제도로, 갑오경장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서얼문제는 조선의 성립과 함께 대두했다. 처첩 분별의 조치와 함께 태종 때는
서얼차별도 점차 법으로 정해졌다. 법적인 서얼차별의 방향은 서얼의 관직등용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입안되어 1415년에 우부대언 서선(徐選) 등 6명은 종친과 각
관리의 서얼자손을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고, 이 건의는
결국 법으로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1555년(명종 10)에 서얼차별 문제가 확실시되는데, 그해
〈경국대전〉을 주해(註解)하면서 앞 조문의 '자손'(子孫)이란 말을 아들과
손자만이 아닌 '자자손손'으로 해석했다. 서얼차별은 계속 정치적으로
문제되었고, 차별을 철폐하자는 서얼허통 논의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신분질서와 관련하여 반대했다. 그 요지는 첫째, 존비(尊卑)의 등급을
엄격히 해야 하고, 둘째, 선왕의 법을 지켜야 하며, 셋째, 이들을 등용하면
명분이 문란해진다는 것이다. 이후 두 주장은 서얼허통론 찬반의 기본논리로
자리잡았다. 선조대에 이르러 이이(李珥)에 의해 다시 서얼허통론이 제기되었다.
그 목적은 군량과 군마조달을 위한 것으로, 쌀 80석(石)을 납부하면 허통을
허락했다. 허통은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반적인 납속책(納粟策:일정액을
정부에 내고 벼슬을 받는 것)의 확대를 통해 더욱 큰 범위로 확장되었다. 이후
허통논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의 해체라는 사회변화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 논의가 활발해지는 1680년(숙종 6)에는 돈령도정(敦寧都正) 김수홍(金壽
弘)이 허통을 상소하자 남인 계열의 윤휴(尹鐫)도 이에 찬동했는데, 그는 양첩(良
妾) 소생인 경우 허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때가 되면, 서얼들이
집단적으로 상소하여 허통을 청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1694년 이후 정권을 잡은
소론은 납미허통책(納米許通策: 일정 액수의 쌀을 내고 허통하는 것)을 폐지해
금고법을 폐기하려고도 했다.

1708년에 정부는 서얼 자신의 일대(一代)만 업유(業儒)ㆍ업무(業武)라 하고,
아들대부터는 유학(幼學: 士族으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부르게 했다.
이 조치는 1745년(영조 21)에 나온 <속대전>에 그대로 실렸는데, 그 뜻은
아들대부터는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실제로 서얼에 대한 차별은
아직 법적으로 존속했지만, 1772년 정부는 끈질기게 반대해온 서얼의 삼사(三司:
사헌부ㆍ합칭, 사대부의 상징적 관사를 의미) 청요직 임명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정조의 등장은 서얼허통정책에 더 큰 진전을 가져왔다. 정유절목(丁酉節目:
1777년에 내린 정치지침서)이라는 조치를 내려 서얼차별에 대한 명분은
인정하면서도 허통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또 실제로도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북학파의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 등의 서얼
출신을 임명했다. 서얼 출신의 등용금지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그들이 대거 고위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아 한말(韓末)에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져 있다.
국문학자 가운데는 허균이 실제 지은이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도
있지만, ‘이식’이란 사람의 문집에 허균이 지었다는 구절이 있고 또
<홍길동전>에 나타난 사상은 허균의 사상과도 통한다고 하는 면에서 본다면
허균의 작품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홍길동전>을 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
소설에 담겨 있는 뚜렷한 사회 비판 의식이다. 첩이 난 자식을 차별하는 현실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고, 부패한 정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미 4백여 년
전에 살았던 허균이 그 시대의 잘못된 점을 깨닫고, 소설 작품을 통해 그것을
날카롭게 꼬집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이런 소설을 쓴 허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이름난 가문에 태어나 순조롭게 벼슬길에 올랐던 사람이지만 당시의
정치에 불만을 품었고, 서얼의 차별 대우를 철폐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깊이
사귀었다고 한다. 유명한 여류 시인 ‘허난설헌’은 그의 누이이기도 하다.

소설은 그 당시 사회를 반영한다고들 한다. <홍길동전>이 지어진 바로 그
당시에도 적서 차별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해 재주를 썩인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의 스승이었던 이달(李達.1539.중종 34∼1612.광해군 4)도 그랬다.

한편, 홍길동이란 인물도 허균이 자기 사상에 맞춰 완전히 꾸며낸 인물이
아니다. 물론 ‘적서 차별을 비판하고, 부패한 탐관 오리를 벌주며, 새로운 이상
국가를 그린’ 허균의 사상이 작품 속에 담겨 있지만, 그 당시 홍길동 같은
인물이 실제로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도적 두목이 연산군
때인 1500년경에 활약했으며, 홍길동이 아니더라도 변란을 일으켜 나라를 뒤흔든
인물이 적지 아니했다.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웠고 정치가 썩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현실 문제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면 당연히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비극적으로 끝날 만한데 <홍길동전>은 그렇지가 않다. 이게 바로
우리가 생각해 볼 두 번째 문제이다.

사실 <홍길동전>에는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내용이 많다. 초란이 보낸 자객이
칼을 들고 길동의 방으로 올 때, 길동은 도술을 부려 뭔가 주문을 외자 바람이
일어나며 산 속이 나오고 검은 구름이 일어나 비를 뿌린다. 그야말로 호풍환우(呼
風換雨)한다. 두 번째 위기가 닥쳤을 때도 길동은 도술을 부려 풀로 여덟 명의
가짜 길동을 만들어 팔도를 누비게 하고, 여덟 명이 서로 자기가 길동이라고
주장하게 만든다. 율도국에서 요괴를 물리치는 장면도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요괴를 등장시킨 것도 그렇고 신통력을 부려 없애는 것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첩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도 길동의
도술로 해결된다. 길동이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받게 된 것도 도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지, 적서 차별이 없어진 것도, 잘못된 관습이 사라진 때문이 아니었다.
작품 속의 홍길동이 도술을 부려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한 점 등은 지은이가
의도했던 문제들을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면, 당시 적서 차별의 관습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홍길동전>을 읽을 때 적서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 사회
모순을 읽어야 하고, 부패한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사회를 비판한 지은이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 선조 때, 서양갑,
심우영이라는 사람들이 ‘서자손의 출세의 길을 막는다’라는 관습을 철폐해
달라고 상소하였다가 실패하자 쿠데타를 음모하다 적발되어 처형을 당한 데서
소재를 얻었다고도 한다.

이 소설은 우리 나라 최초의 도술 소설이면서 한편으로는 지방 관리들의 옳지
못한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든가 탐관오리들을 골탕먹이는 점
등은 일종의 인도주의적인 면도 엿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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