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잠시 쉰다면서 누웠다가 눈을 뜬 게 10시 반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이 메일을 드리지 못했던 것과 플로리다를 다녀 온 소회를 정리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전 생활의 리듬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편이지요?
플로리다는 남국의 꿈이라 불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곳의 생활에 대해 자본주의의 꽃이라 이름 붙였는데, 자본주의적 성취의 결실을 누리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김동명의 “파초”는 고향을 그리는 ‘불타는 향수’와 그것이 부각되는 ‘겨울’의 현실이 공존하고 있어서 암시된 남국의 꿈이 애잔한 여운을 안기는 반면, 나의 플로리다 견문은 그 파초가 자기 고향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본 셈이고, 그런 의미에서 남국의 꿈은 현실을 넘어서려는 낭만적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은 여상한 일상 속에서 묻혀서 퇴색되는, 혹은, 꿈이 일상이 되었기에 꿈이랄 것도 없는 상태를 대변하는 듯 여겨졌습니다. 날씨와 물적 기반이 전제되어 있고, 안전이 보장되어 있으며 여가 활동이 하루 생활의 주축을 이루는 공간, 그래서 자본주의적 꿈이 이루어진 공간이었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일상에 대해서는 저의 판단을 미루고 여백으로 남겨놓겠습니다. 모두가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잠을 줄이고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까 사람에 따라 다를 꿈의 모습을 서투르게 예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운 점은 나이가 들수록 포용력이 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경험의 폭이 넓기 때문에 미숙한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것도 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포용의 대가로 자신의 생활의 일부가 희생되는 것도 받아들이는 모습. 이것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포용력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이 순간적인 인상이고 모든 것이 여유로운 여건에서 그러할 확률이 높을 것은 인정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을 여유롭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지속시켜나가려는 것은 깨닫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지요.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이인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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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기다리는 마음만큼 애처롭군요.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한 듯 만개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꽃들은 혹시 마비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느끼게도 합니다. 봄은 소생의 어려움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듯 합니다. 예전에 어느 때부터인가 봄만 다가오면 이유없이 서글픈 생각에 젖어들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꽃샘 추위와 버탱기며 꽃잎을 피우는 풀들과 나무들이 인간의 삶의 과정을 연상시키며 존재의 애처로움을 한껏 내비치는 듯한 인상을 깊이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해가 지나가며 봄만 되면 꽃들은 또 그렇게 피어나더군요. 그것도 작은 꽃들이 먼저 그 추위를 감당하면서. 그렇게 봄은 삶의 애닯음을 저의 뇌리에 심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문득 감상에 젖어 그 꽃들과 인생을 조망만 하기보다 다가가 만져 보고자 하는 마음이 돋았습니다. 연한 꽃잎을 손끝으로 느끼며 눈을 가까이 가져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꽃들은 향기가 깊더군요. 그래서 언감생심, 인생에서도 그러한 향기를 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대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즐거움이기 때문인지 여전히 추위에 움츠린 애닯음이 먼저 코끝을 찔렀습니다. 지금도 다소 그렇습니다. 제게 돋아난 마음도 잎을 내고 꽃을 피울 때면 추위가 닥칠 것이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렇긴 해도, 추위를 이긴 꽃의 향기가 짙다면 인생의 향기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비록 성급한, 혹은 값싼 믿음일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봄날은 가는군요. |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이인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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