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보스턴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다 만났던 날이지요. 준성이도 우리가 만나고 있던 그 순간에 페이스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켰었고요. 예배 후에 다른 일정들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모두들 새학기의 일정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여 기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는 "황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주제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구원의 메세지는 황야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었지요. 요한의 낙타 털옷과 거친 음식(메뚜기와 들꿀)은 황야 생활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절제가 의미를 배태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여러분도 현재 각기 양태는 달라도 모두 황야의 삶을 살고 있으며 후일에 각자의 분야에서 구원의 메세지를 외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 한번쯤은, 내가 준비했던 그 메세지가 후일에 모파상의 목걸이처럼 가짜인 것으로 밝혀지게 되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목걸이를 마련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 여인의 삶은 자신의 생존과 명예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요. 새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 삶의 모든 절제가 의미를 지니는 순간이 되도록 점검하면서, 더불어 현재의 삶의 질이 감당하기 어려운 도덕적 중압감 때문에 손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추신: 준성군, 숙취의 후유증은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없어집니다.
이인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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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님, 이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잠시나마 저를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홍차에 들꿀을 넣어 먹으면서도 제가 황야에서 메세지를 준비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메세지가 과연 나중에 어떻게 판가름 날지 두렵기도 설레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왔던 아이디어 인가요? 아마도 우리에게 현재의 행동으로 인한 마지막 결과를 미리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마도 우린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정해진 결과를 알고 그대로 삶을 반복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간단한 프로그램이 많들어 내는 세계조차 직접 그 프로그램을직접 시행해보지 않고는 미리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가설이 맞다면 우리의 삶은 그 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한 때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우습게도 제 인생이 나중에 어떻게 펼쳐질지 제가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살아보기로 했던 생각이 납니다. 삶에 대한 답을 잘은 모르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기 보다는 명확이 눈 앞에 있는 것에 내가 가진것을 쏟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두들 멋진 한 주 보내세요.
김종훈 드림.
저의 집 창문은 "버짓" 이사짐 트럭 주차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끔 아침에 시야를 가려서 블라인드를 더 높이 말아올리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이삿짐 트럭의 컨테이너가 공명하는 소리 때문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포근한 향수에 젖어들곤 합니다. 지난 주였던가요? 비가 오던 날 밤이었습니다. 11시경에 집으로 왔었는데 창밖에서 굵은 목소리가 상스런 욕을 해대고 있는 겁니다. 얼마 있다가 사그라들겠지 생각했었는데 아마 30분은 족히 똑 같은 욕을 계속 해댔습니다. 사실 작년에도 몇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싸우는가 보다 생각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이삿짐 트럭의 뒤쪽 슬라이딩 도어가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그 욕소리가 그쳤던 것이 저를 궁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후로 잠잠해졌고 그래서 저도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블라인드를 올리고 있는데 창밖에 주차되어 있던 이삿짐 트럭의 뒤쪽 슬라이딩 도어가 올라가면서 안쪽에서 사람이 나오는게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서 창을 통해 조금 관찰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흑인이었고 옷은 트렌치 코드를 입었으며 서류 가방처럼 생긴 가방을 들었는데 한쪽 겨드랑이에 냉장고 골판지 상자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컨테이너를 내린 뒤 그 골판지를 건물의 처마 밑 어느 한 쪽에 끼워두고는 주차장을 떠났습니다. 그 차도 얼마 있지 않아서 출발했지요. 갑자기 그 궁금했던 일의 전개 상황이 추론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노숙자였고 상스런 욕을 해댄 것은 그가 늘 이용하던 이삿짐 트럭이 그 날 늦게 돌아왔거나 오지 않아서 잘 곳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 큰 소리로 욕을 했습니다.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30분 동안 욕을 해대고 있으면 주차장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와서 가능한 트럭의 뒷문을 열어 줍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잘 곳을 해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 생떼를 쓰고 있었던 것이지요.
생떼는 그렇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기대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시위들 중 생떼를 쓰는 듯 보이는 경우는 대개 참가자들이 그들의 최종적인 사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아닌 사람들이 생떼를 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우리나라가 아주 구차한 곳이라는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생떼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최종 수단이며 그들이 처한 상황의 절박성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중에 어느 한 사회에 소속되어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의 이익이 위협당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면 그 집단은 대개 생떼를 쓰는 전략을 쉽게 선택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비논리적이고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더라도 자신이 소속된 그 집단이 방향을 그렇게 설정하면 개인은 그 방향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양태입니다. 개인은 무한히 도적적일 수 있어도 집단은 무한히 이기적인 존재이거든요. 그리고 집단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어두운 욕망을 가리고 보호하는 지붕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떼는 가진 것이 없는 정말 절박한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최종적인 수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떼를 그렇게 이해하고 내가 생떼를 이용하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흑인이 생떼를 쓸 때 그 상황을 그렇게 이해한 내가 어떤 조처를 취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안한 일이긴 한데 그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해결책이 될 듯한 생각이 있었으면 저가 꺼낸 이야기의 방향이 달랐겠지요. 혹시, 이런 상황에 나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관해 방향성 있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는 그 지혜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사실, 생떼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그 상황에서 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저의 무능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생떼를 부리는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서 인간 존재의 취약함에 가슴 저린 동정을 느꼈고 나의 약함도 느꼈었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은 그날 아침 주차장을 떠나던 그 흑인의 뒷 모습이 아직도 아련히 뇌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이인기 드림 |
두기씨,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는 하지만, 두기씨가 그 노숙자에게 크리스천의 모습을 투영했다면 한 단계를 더 상상한 것입니다. 두기씨도 알고 있듯이 모두가 과정중에 있습니다. 그 과정은 죽어야 끝나는 것이니 완전하지 못한 모습들이 서로를 힘들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들은 그 말은 너무 괘념하지 마세요. 무우 자르듯 정의될 수 없는 경우이기도 하거니와 예수님도 어느 구절에서는 "내가 심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I do not judge anyone who hears my words and does not keep them, for I came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John 12:47) 라고 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위 구절에는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까지도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지요. 믿고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주간 평안한 마음 지니시고 세미나에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이인기 드림 --------- 원본 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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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오늘 예배는 참석치 못할 것 같습니다. 8시쯤에 성경공부하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김종훈 드림.
From: kima...@googlegroups.com [mailto:kima...@googlegroups.com] On Behalf Of likew
Sent: Sunday, February 19, 2012 5:26 PM
To: kimalgosa@..; sunmi.lee0
Subject: 팀원 여러분, 좀 쉬셨습니까?
저의 집 창문은 "버짓" 이사짐 트럭 주차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
어제 교회에서 노숙자들(?)에게 무료음식을 나누어 주었을 때 함께 일한 팀원들도 느낀 바가 여러가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면서 제가 느낀 바를 몇자 적어봅니다. 우선, 다들 질서 정연하게 나름대로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초적인 본능을 해결해야 하는 공간이었지만 질서의식이 있었던 것은 배식을 하기 전에 커피 및 수프 등을 먼저 나누어 줌으로써 질서를 지킬 여유를 주었기 때문일 수 있고, 또한, 밴드가 라이브로 공연하며 분위기를 본능적 형식에서 문화적 형식으로 적절히 바꾸어 놓았던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노숙자의 행색을 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숙자로 추정되는 절반 가량의 사람들도 봉사단체에서 지급한 방한복 등을 입고 있었고 추위 때문에 노지에서 잠을 자는 경우는 없어보였으므로 절대적인 핍절을 겪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결핍이 있는 공간에서 질서가 유지된 것은 강제적인 규칙의 존재 유무보다는 도덕적인 의식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준 것 때문이 아닐까 여겨졌습니다. 두번째로, 일반적인 노숙자 행색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커피를 주문하던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설탕을 커피에 '들이붓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실제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분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이후에 배식된 음식들이 고칼로리 군이었던 것도 그런 영양학상의 이유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결핍을 느끼는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보상하려는 심리에 따라 살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결국 그 결핍에 의해서 조정되어버리는 것을 많이 보고 또한 스스로 느끼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보상 심리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그 결핍은 결국 자신의 삶의 형식을 규정하게 됩니다. 제삼자라도 그 '설탕을 들이붓는' 행동에 의해 그 사람을 파악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세번째로, 모두들 두세번 씩 음식을 받아갔고 나중에는 그릇 등을 가져와서 남은 음식들을 싸갔지만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빵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좀 의아했습니다. 식탁 마다 빵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은 빵들이 수북히 담겨 있었는데 모두 쓰레기 통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고기 등은 싸가면서 빵은 왜 버릴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빵들이 수북히 담긴 쓰레기 봉투를 누군가가 동여매어 가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핍의 상황에서도 경쟁과 쟁탈이 아니라 나름의 분배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매주말 정해진 시간에 오면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또 음식을 싸갈 수도 있다는 기대가 계속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지와 게으름의 인상을 씌워놓고 마지 못해 가끔씩 던져주는 방식의 베풂보다는 약간의 책임의식, 혹은 의무감을 갖고서 베풂을 꾸준히 실행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생존본능에 따라 쟁탈하려고만 하거나 탈법적인 생떼에만 의존하기보다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키고 나름대로의 여유를 서로 나누는 문화를 만들 기회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은혜의 깊이를 따지건대 우리는 다소 의무감을 갖고서 그 은혜를 거저 베풀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네번째로, 미국의 자원봉사 문화는 참으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말씀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이었습니다. |
한 주간 평안하십시오.
이인기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