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여름을 맞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환타지 소설을 쓴다는
기분으로 썼는데 썩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예상 했던 것보다 분량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날씨가 선선해지면 다른 계획이 있는데...
by hannock 1998 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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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Plot Hazardous Enterprise
내 왼손의 동맹
< 제 1부 붉은 드래곤과 푸른 장미의 기사 >
ChapterⅠ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한 시각은 새벽 두 시쯤이었다. 그 때 나는 어
김없는 새벽 속쓰림에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순전히 못 먹어서 생긴 병이었다. 감자 두 개와 멀건 죽으로 이루어진 식사.
난방이라는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는 학교 기숙사. 그리고 극기 훈련이라는 명분
으로 행해지는 딱딱히 얼어붙은 땅바닥을 파헤치는 의미없는 작업.
교장 선생은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출교를 명했다. 나는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등록금이 이미 석 달치가 밀려 있었다.
교장 선생은 내 사물함을 샅샅이 뒤지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내 사물함에는
텅텅 비어 있어 조그마한 새앙쥐가 보금자리를 짓고 산 지가 오래되었다. 교장
선생은 나에게 아침도 먹지 말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기숙사 문을 열었다. 안이나 밖이나 똑같이 추워 소름도 돋지 않았다. 사
망 소식을 전해온 우편마차와 배달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부는 나에게 서류를 내밀었고 나는 사인을 했다. 나는 누가 돈을 주어 나
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시켰느냐고 물었다.
"드러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에게는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 후 3개월간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목표는 제국의 수도, 메트로였다. 아버
지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그리운 내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11년 동안 나는 가
보지 못했다.
제국의 수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는 한 사내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
다. 제국의 탄생 이래로 최대최악의 채무자인 남자가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그
남자가 빚진 돈의 액수를 합치면 평범한 왕국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많다고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그래서 메트로는 지금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빚쟁이들이 그 죽은 남자의 집에
몰려들어가 물건을 차압하려는데, 보이는 것은 하얀 거미줄뿐 환금성이 있는 물
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 남자가 남긴 것은 무어래? "
"글쎄, 자식 놈 하나 달랑 남겼다는군. "
그런데 가끔씩 고갯마루에서 산적들이 나를 붙잡았다. 굳은살이 배긴 맨발에
다 헤진 옷차림의 나를 붙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덕분에는 나는 김이 무
럭나는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듬뿍 먹을 수 있었다.
산적들은 나는 사나흘 정도 구금 아닌 구금을 한 다음에 나를 풀어주었다. 헤
어질 때는 주먹밥이 가득 든 보따리도 건네주었다.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뛰었다.
나는 3개월 안에 메트로에 도착하여야 하고 고등 법관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나는 상속을 포기한다고 선언을 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안 지 삼개월 안에
상속 포기서를 접수시키지 않으며 나는 군말없이 상속을 인정을 한 것으로 된
다.
그 결과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국 건국 이래의 최대 채무자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연 5할의 고리대도 얻어다 썼을 것이므로 그 복리이자를 생각하
면 아버지의 기록을 두 배로 경신하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효소멸일자에 정확하게 하루가 늦게 메트로에 도착했다. 충분히
예상한 한 일이기에 별 실망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씨를 빌어 태어날 때부터
이런 운명은 예견되어 있었다. 철저히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좌
우되어 지는 삶.
성문에 들어서자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집사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드러커씨 집안의 집사입니다. "
과연. 나는 순순히 그 사람을 따라갔다.
드러커는 세레미아 제국의 최대 부자이다. 선대의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해외무역과 금광개발에 투자해 돈을 모았고 일설에 의하면 그의 재산은 세레미
아 제국에서 열 네 번째로 큰 호수인 하바로프 호수를 금괴로 메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세레미아 제국이 분열되어 내전을 겪던 시절, 여덟 명의 황자가 각각 군사를
일으켜 황위쟁탈전을 벌이던 때, 과감하게 제일 약했던 삼황자를 지원하여 최종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그 냉정하고 치밀한 판단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다른 재력가들이 대개 지원했던 가장 넓은 영지의 소유자였던 일황자나 국경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있던 사황자에 반하여 삼황자는 그 어머니쪽의 가문도 미
약했고 그 영지도 황량한 사막에 불과했고 그 휘하 군사도 절대 소수였다. 그리
고 전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칠황자의 어머니는 바로 드러커의 누님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선택은 의외였지만 적중했다.
그 후 그는 여러 다른 나라의 전쟁에도 개입해 막대한 군자금을 빌려주곤 했는
데 그의 돈을 차입한 쪽이 언제나 승리하였고 그의 돈은 떼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내 아버지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사람이 바로 드러커인 것이다.
집사는 나를 황궁 근처의 붉은 기와집으로 인도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었지만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 있는 집이었다.
"도박에 미친 귀족 자제가 빚을 못 갚자 차압한 건물입니다. "
집사는 나에게 욕실과 침실을 안내해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집사는 수건과 새옷을 가져다주고는 떠나갔고 나는 비취옥으로 된 욕조에 들어
가 목욕을 했다. 나는 잠시 감동했다. 내 피부에 와 닿는 따뜻한 물이 주는 온
기에 취한 것이다. 내 살갗은 뜻하지 않은 호강에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육체와 정신의 긴장이 풀리자 몽롱한 잠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 지난 11년간의
기억들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제국의 서쪽 고산지대에 위치한 싸구려 기숙학교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
격. 체온을 빼앗는 천년설이 녹은 물의 느낌. 통과제의로써 행해지는 상급생의
시달림과 그 극복. 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친구들. 물푸레나무 회초리
를 든 선생들의 체벌. 몇몇 기숙학교를 탈출한 동급생들. 그리고 지하의 학교감
옥. 독방. 그 벽에 쓰여진 낙서들. 자유.
그날 밤 나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만났다. 천장에서 갑자기 사람이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자 창문을 부수며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 그 사람과 칼싸움을 벌였
다. 그리고 뚝 떨어진 사람을 죽였다. 떨어진 사람은 죽기 직전 표창을 나한테
던졌다. 덕분에 나는 그 사람이 자객임을 알 수 있었다. 목표는 나였다.
"아나모이드 나무 뿌리에서 채취한 독액을 발랐군. 피를 만나면 곧 죽음이지.
"
검은 옷의 사내는 기둥에 박힌 표창을 뽑아 수건에 감싸더니 품안에 간수했다.
나중에 써먹을 모양이었다.
나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잘 볼 수가 있었다. 사내는
피풍막을 걸친 야전복을 걸치고 있었다. 통상 사막의 전사들이 입는 복장인데
요새는 용병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는 복장이었다. 이 사내는 붉은 댕기로 질끈
묶은 꽁지 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행에 민감한 축에 속한 것 같았다.
"아까부터 인사를 해두고 싶었지만 이 녀석이 몇 시간이고 천장 속에서 개기는
바람에 늦었어. 내 이름은 맥머피, 푼돈에 몸과 실력을 파는 에이전트이지. 드
러커씨에게 부탁을 받았어. 네 곁에서 분위기를 좀 잡아 주는 역할을 해 달라더
군. "
맥머피는 칼끝으로 자객의 옷을 뒤졌다. 전갈 한 마리가 칼등을 타고 기어 나
왔다. 자주색 무늬의 전갈은 나를 향해 기어 왔다.
"네 칼은 어디 있지? "
"없습니다. "
맥머피의 눈이 커졌다.
"없어? 무슨 소리야? "
"나는 기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닙니다. 그저 인문학도입니다. "
"인문학도? 그게 뭐야? 문신한 야만인의 칼을 쓰는 자라는 뜻인가? "
전갈은 내 발치에 이르렀다.
"아뇨. 서정시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읽고 서사시 속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며 인간을 탐구하는..."
"됐어. 글선생이라는 얘기잖아. 좀 슨 책에 코나 들이대는 답답한 족속 말이
야. "
"..."
나는 몸에다가 독한 향수를 뿌려댄 이 작자를 비꼬는 농담을 몇 마디 던져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칼을 든 자 앞에서 혀를 내밀지
말라는 격언이 떠오를 뿐이었다.
맥머피는 죽은 자객의 허리전대를 헤집어도 반짝이는 물건이 나오지 않자 적잖
이 실망한 눈치였다.
"아, 언제쯤이면 나도 시간제로 경비를 받을 수 있을까? 여봐, 이 작자가 저
위에서 몇 시간을 버텼는 줄 알아? 일곱 시간이야. 일곱. 그만큼 나도 밖에서
벌벌 떨었지.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약값으로 계약금을 다 날리겠어. 나는 이
번 계약은 매우 손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입찰 때 낮은 금액을 제시했
었지...... 당했어. 그 자린고비 녀석. 분위기만 잡으면 만사 해결된다더니. 세
상에, 다크 보일드의 아들이 백면서생 오라비라니. "
"..."
"이 죽어 나자빠진 녀석은 더 불쌍하군. 이 자식도 네가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잖아. 그러니깐 찬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 그냥 독 묻은 단검으로 스치기만 했으면 됐는데 너무 긴장했어. 하긴
나도 몰랐으니깐 누가 알겠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일부
러 싸구려 검을 들고 나왔을 정도야. 과일 깎는데 식칼을 쓴다는 힐난을 받을까
봐서 마음을 썼지. "
"..."
"하지만 정말 대단해. 아무런 무장도 없이 이 메트로로 들어오다니 대단한 배
짱이야. 자네의 피를 보고 싶어하는 무리가 이 무법도시에 얼마나 깔린 줄 알
아? 오오, 이런. "
맥머피는 내쪽으로 다가 왔다. 분명 성큼성큼 걷는 것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천
천히로 느껴졌다.
내 목에는 지금 이쁜 전갈이 잠자코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갈의 미세한
털이 유발한 극심한 간지러움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땀방울 하나가
내 눈썹에 맺혔다.
맥머피의 독한 향수가 내 코밑으로 확 밀려왔다. 그러자 전갈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나는 비로소 저 향수가 독충들이 싫어하는 종류의 물질을 함유하고 있음
을 알아차렸다. 전갈은 부르르 떨더니 내 목에서 툭 떨어졌고 그 때 맥머피의
칼이 반원을 그렸다. 전갈은 두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기둥에 기대어 긴 숨을 내쉬었다. 3개월 전 만해도 이건 내 삶에 들어 있
지 않았던 일이다. 한동안 굳어 있던 피가 온 몸을 순환하기 시작했고 뇌세포가
풀려 나갔다. 이건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객이라니. 나를 죽여서 무엇
에 쓸 것인가.
"이 자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요? "
맥머피는 칼을 닦으며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다크 보일드의 아들이니깐 그렇지. "
"하지만 내가 죽으면 그나마 돈을 못 받잖아요. "
와하하하. 맥머피는 배를 붙잡고 웃었다.
"하하, 너는 전혀 네 아버지에 대해서 모르는 구나. 이 자는 네 아버지의 빚쟁
이들이 보낸 자가 아니야. 네 아버지의 연적들이 보낸 자이지. "
"엣? "
"네 아버지는 세레미아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세 가지 분야에서의
명성 때문에 말야. 하나는 너도 잘 알다시피 추측 불가능한 빚의 규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당금 최고의 바람둥이였다는 점이지. 지금 상류층의 아녀자
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는 여성은 너무나 못생겼거나 더 이상 여자가 아
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네. 그리고 미처 손길을 받지 못했던 여인들
은 즐겁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 그러니 네 아버지에게 애인이
나 아내를 빼앗기고서 피눈물을 흘린 남자들이 얼마나 많겠나. 자신이 흘린 피
와 눈물 양만큼 원수에게 뺏고 싶은 마음 당연하지. 암. "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발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이잖아요. "
맥머피는 코웃음을 쳤다.
"멋진 사고방식이야. 계속 그렇게 살라구. 아마도 등뒤에서 칼 맞고 비명횡사
할 걸. 원한에 눈이 뒤집힌 사람은 원수의 사돈에 팔촌에 친구도 곱게 보지 않
는 법이라구. 하물며 피를 받은 아들인데. 그리고 이런 염려도 있었겠지. 자신
의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미리 못된 호랑나비의 애벌레를 제거하자는 심산
도 말야.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친정에 돌아와서 룰루날라 무도회나 나가면서
밥을 축내는 딸은 그리 반갑지 않은 법이니깐. "
맥머피는 계속해서 내 아버지에게 연인과 부인을 빼앗긴 남자들의 이름을 거론
했다. 무슨무슨 공작, 백작, 장군 이름이 들먹여 졌다. 모두 권력가에다가 명예
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그럼 어떻게 내 아버지는 지금껏 생존해 왔죠? 그렇게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이고서도. "
맥머피의 점점 더 즐거워했다.
"네 아버지의 세 가지 명성 중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무엇인 줄 아나? 바로 세
레미아 제국 제일의 검객, 바람의 해역에서 뭇 해적들을 소탕한 사나이, 필레모
아 고원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전쟁 영웅, 백 여덟 번 결투에서 스물 일곱
명의 심장을 가져간 불패의 검의 소유자, 그 이름 다크 보일드. 네 아버지이지.
"
놀라웠다. 어떻게 그걸 나만 모를 수가 있었지.
묘(墓)를 도굴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田叔)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도
박은 불량배들이 하는 것인데 환발(桓發)은 그것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행상(行商)은 남자에게 있어서 천한 직업이지만 옹락성(雍樂成)은 이것으로 재
산을 모았다. 옹백(壅伯)은 초라한 기름 장사로 천금을 얻었고 장(張)씨는 보잘
것없는 찻집(茶店)을 경영하여 천만장자(千萬長者)가 되었다.
칼 가는 하찮은 기술을 가지고도 질( )씨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사람이
나왔고, 장물가공(臟物加工)과 같은 사소한 장사를 가지고도 탁(濁)씨와 같이
말을 끌고 외출할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수의(獸醫)는 보잘것없는 기술일는지 모르나 장리(張里)는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를 정도의 신분이 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부(富)라고 하는 것은 어떤 직업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돈이란 어느 일정한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도덕이란 생활의 여유가 있는 데서 생기
는 것이라고 하였다. 군자(君子)가 부(富)하게 되면 덕을 행하려 하며, 소인(小
人)도 부(富)하게 되면 소인대로 자기의 생활 방법을 돌이켜 보게 된다.
고기는 깊은 물에 살며 짐승은 깊은 산 속에 사는 것처럼,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仁義)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부하면 부할수록 덕망(德望)도 높아지지만 일단 부를 잃게 되면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실의(失意)의 경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부호(富豪)의 자식은 거리에서 처형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속담은 참으로 옳
은 말이다. '이(利)를 위해 모일 때는 모두 웃으며 모이지만 이가 사라지면 제
각기 흩어지고 만다'라고 하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왕후(王侯), 대부(大夫)까지도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물며 서민(庶民)
이야 태평하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들이 묘당(廟堂)에서 계략을 꾸미고 조정에서 논의를 거듭하며 목
숨을 걸고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이나 또 산 속 동굴에 사는 은둔자(隱遁子)가
순결함을 가지고 유명해지려는 것도 최종의 목표는 부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청렴한 관리도 오랜 세월을 지내면 재산을 모으게 되며, 욕심
없는 상인(商人)도 나중에 부자가 되는 것이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두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용감한 병사들이 전장에 앞장서서 성(城)을 공격하고, 적진을 함락하여
격퇴시킨다든가, 또는 적장(敵將)을 무찌르고 적기(敵旗)를 빼앗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꺼리지 않고 돌격하며, 불과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은 모두
후한 상을 받기 위한 것이다.
거리의 무뢰한들이 강도, 살인, 유괴를 행하고 묘지를 파헤치며 화폐를 위조하
고, 작당을 해서 세력권을 확장하다든가 또는 의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는가
하면, 뒷골목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며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 속으로 뛰어
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재물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한 움큼 재산도 다 날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재물까지 빌어다 저 바다의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는
한번도 돈을 모으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다만 소비하는 일로만 일생을 보
냈다.
"자네, 도자기를 구울 줄 아나? "
"모릅니다. "
"그럼, 양모직조술은? "
"모릅니다. "
"그럼, 대포제작술은 어때, 요새 주물공이 모자란다는데. "
"글쎄요. 철로 된 물건은 만져본 적이 없어서요. "
"그래? 그러면 향수는 만들 줄 아나? 아니면 보석세공 같은 것은? "
"...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무언가? "
"그저 책 읽는 것입니다. 고전하고 이런저런 논문들하고 외국어 몇 개. "
드러커씨는 약간 눈이 커졌다.
"외국어? 어느 나라 말이지? 유창한가? "
"아니요. 회화는 전혀 못하고 읽는 것만 잘 합니다. "
드러커씨의 눈은 다시 작아졌다.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업은 배운 바가 전혀 없다. 도대체 뭐 하러 그런 학
교를 다녔나? 법이나 의술을 공부하지 않고. 쯧쯧쯧. 자네, 자네 아버지가 얼마
나 많은 채무를 진 줄 아나? "
"대강 짐작하고 하고 있습니다. "
"아니지. 그 짐작에다가 거듭제곱을 해야 그 액수가 나올 거라네. "
"예. "
드러커씨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졌다. 찻물을 입에 담고서 혀를 굴린 다음에
목뒤로 넘겼다.
"여보게. "
"예. "
"갚을 수 있겠나? "
"..."
나는 이 드러커라는 능구렁이의 심사를 알 수 없었다. 단추 구멍 같은 좁은 눈
은 자신의 심중을 남에게 내보이지 않고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을 터부시했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금기했습니다. 폐하와 전하라는 단어는 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왕과 신하를 연결해주는 문밖에 서 있는 왕의 시종을 일
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우리가 신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단어들은 아
무런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그래서 그 누구의 이름도 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
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가족의 아닌 남에게는 숨
기고 있어야 했습니다. 나쁜 마법사의 손에 그 이름이 들어가면 큰 해가 끼친다
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
드러커가 말을 끊었다.
"잠깐, 지금 무엇하고 있는 건가? "
"딴청 피우고 있는 겁니다. "
"하. "
드러커는 강한 안광을 내쏘았고 나는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해서 그 빛을
받았다.
점차 그 시선에 불쾌해지고 피곤해 질 때 드러커의 노예비서가 들어왔다. 떨
벌어진 어깨에 잘 생긴 얼굴의 미남이었다. 그는 드러커에서 다음 약속이 기다
리고 있음을 알렸다. 내 앞에는 미처 마시지 못한 차가 남아 있었다.
드러커는 옷자락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나는 자네 아버지와 친했어. 자네 아버지가 내 생명을 한 번 구해준 적이 있었
지. 나는 언제쯤 그 빚을 갚을까 고민했지. "
옆에서 노예비서가 한 마디 거들었다.
" 맞습니다. 빚은 꼭 갚아야 되는 거지요. "
" 그러나 자네 아버지 다크 보일드는 너무 강한 사나이였어. 결국 나는 그 아
들에게라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네. 복수와 빚은 마찬가지야. "
"똑같이 대를 이어가며 갚는 거지요. "
"그래서 어제 자네를 구해주라고 사람을 고용한 걸세. 그 빚은 이제 청산된 걸
세. "
"깨끗이. "
둘은 숙달된 만담가 듀오 같았다. 청중이 나 하나뿐인 게 아쉬웠다.
드러커는 소매자락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나한테 던졌다.
"그리고 자네 빚만 남았네. "
하늘은 무지하게 맑았다. 내 가슴이 시퍼럴 정도로.
사슴이 뛰노는 정원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오니 맥머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일은 어때 잘 풀렸어?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
맥머피는 주화가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잔금을 받았어. 자식들. 녹슨 동전만 골라주는 건 뭐야. 다 네 덕분인데, 어
때? 내가 한턱 내지. 저 선술집 어때? 저 주인집 딸 가슴은 아주 크다구.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었다.
화려한 사륜마차 한 대가 맥머피와 나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맥머피는 질시
와 선망의 눈길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맥머피는 부연 먼지를 들이마시고는 탁
침을 뱉었다.
11년만에 돌아온 메트로의 거리는 거울 속의 내 얼굴처럼 달라져 있었다. 판석
을 박아 마차가 쉽게 다니도록 만든 도로에는 외국서 수입한 철혈마들이 질주하
고 있었고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창을 박은 가게 안에는 천국의 산물같은 풍요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이국(異國)적인 패션감각이 주류로 자리잡고 있었
다.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은 스커트. 비단 스타킹. 긴목 장화. 몸매를 드러내
는 꽉 끼는 가죽 재킷. 장식으로 허리에 찬 화검(花劍). 빨갛게 물들인 머리와
가발들. 도발적으로 화장한 얼굴.
젊은 남자들도 변했다. 키도 몸집도 더 커졌고 얼굴은 더 하애졌다. 그리고 늙
은 남자들은 더 탐욕스러워졌다.
확실히 도시는 화사해지고 번영하고 있었다. 세레미아의 포도주, 면직물, 사치
품, 고급 가구는 국경을 넘어 대륙 전역에서 팔리고 해안지대에서는 대규모의
민간제철소가 자생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백만장
자로 자처하는 신흥거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맥머피와 나는 드러커씨 소유의 퍼스트 은행이 내건 간판 밑을 걸었다. 도처에
신탁회사, 화재 및 생명보험회사, 은행 간판이 보였다.
"가난은 무기력, 땅만 쳐다보고 다니게 돼. 혹시 동전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
고. "
맥머피는 잘 차려 입은 은행가들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세레미아의 인구는 급속히 늘었고 도시의 토지와 주택값은 뛰어 올랐다. 도시
민들은 국가 공채와 더불어 증권거래소에서 주식 투자에 몰입하였다. 교외에는
징세청부인들이 짓는 별장들이 들어섰고 상인들은 빚을 진 귀족들의 저택들을
접수하고 있었다.
맥머피는 낡은 경첩을 단 선술집의 문을 열었다.
땡, 문에 매달린 종이 청명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조용했다. 문 근처의 테이
블의 사람들은 모두 맥머피와 나를 쳐다보았다.
"어서오세요. 아저씨. 너무 오랜만이네요. "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앞치마를 두른 처녀아이가 인사를 했고 맥머피가 손을 흔
들자 술집 안의 사람들은 맥머피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맥머피는 사람들을 피해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술집은 안으로 들어갈수
록 넓어지는 구조였다. 2층과 합치면 테이블이 40개는 넘을 것 같았다. 맥머피
는 맥주잔을 받아 들고서 한동안 드러커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정중하게 요청했어. 너를 노린 자객의 수준이 매우 높으니 계약 금액을
수정해야겠다고. 그랬더니 그 즉시 나를 해고하더군. 내 임무는 끝났다나. 독한
놈이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직원은 무조건 자른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봐 사회초년생, 어제 그 자객은 비밀리에 동료에 메시지를 전했어. 전서용 비
둘기가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난 봤거든. 분명 그 쪽은 네 정체와 능력을
다 파악했을 거야. 그러니 더 신경을 준비해야 한다구. 어때, 드러커 그 자식이
새로운 보디가드라도 붙여 주겠다나?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설명했다.
내 아버지가 전에 드러커씨를 한 번 구해 준 적이 있어서 드러커씨도 나를 한
번 구해 줬을 뿐이라고, 더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정말이야? 그것 참. 그렇다면 자네는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겠군. 술이나 더
마시라구. "
맥머피는 맥주를 추가해 시켰다. 처녀아이는 잔을 집어가며 말했다.
"아이 아저씨, 안주는 안 시킬 거예요? "
"안주? 네 젖가슴이라도 베어서 갖다 준다며 모를까, 여기는 순 돼지고기와 내
장요리 뿐이잖아. 나는 원래 채식주의자이거든, 술만 마실래. "
처녀아이는 엉덩이에 다가온 맥머피의 손을 매섭게 치며 나를 가리켰다.
"그러면 이 오빠도 채식주의자예요? "
"안돼. 이 친구는 사실 오늘밤에 안에 죽을 거거든. 아까운 음식을 낭비해서는
안되지. "
"죽어요? 왜요? 병에 걸렸어요? "
처녀아이는 별 관심 없지만 입이 열려 있어 말한다는 식으로 물었다. 나는 저
멀리 가 있는 처녀아이의 시선을 잡으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글쎄요. 새벽 두 시면 찾아오는 속쓰림이 있기는 한데 그게 죽을 병...인가
요... "
나는 이 처녀아이와 무언가 대화라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처녀아이는
내 말을 끝까지 채 듣지도 않고 휭하니 가버렸다.
맥머피는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비웃었다.
"하하하 풋내기, 여자들은 민감한 존재라고. 술값이 어디에서 나오지, 비싼 안
주를 시켜줄만한 존재인지, 단골이 되어 매상을 올려줄 만한 위인인지 금방 알
아차리지. "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 수사학을 가르치던 선생은 여자에 대해서
만큼은 책이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뻔하지 않아. 골방에 틀어박혀 종이하고 문자나 주물럭대는 위인들이 여자하
고 손잡고 말할 틈새나 있었겠어? 여자는 경험이야. '
기숙학교에는 여자아이가 없었다. 다만 교장선생의 딸이 아주 가끔씩 학교에
놀러 오곤 했을 뿐이다. 들창코에 약간 살진 못생긴 여자애였지만 그녀를 사모
하는 남자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허리 아래를 감싼 치마에 혹해 담을 넘어
교장 선생의 사택으로 엿보러 들어가곤 했는데 그들 모두는 모조리 지하감옥 행
이었다.
땡. 문에 달린 종소리가 청명한 소리를 냈고 술집 안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문 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술집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각양각색이었다. 법원 서기의 차림에서부터 부랑자차림까지, 대학생의 제복에
서부터 무도회에나 어울릴 것 같은 댄디 스타일까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같
은 테이블에 앉아서 스스럼없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폐 속 깊이까지 빨아들이고 싶은 향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문을 열고 들어
온 이는 꽃파는 아가씨였다. 장미꽃 한아름을 바구니에 담고서 테이블을 돌고
있었다.
"여봐, 사회 미숙아. 내 돈을 줄 테니 저 아가씨에게서 장미꽃을 사 주겠어?
맥머피는 내 앞으로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왜요? "
"나는 장미 가시 알레르기가 있거든. 장미 가시를 앞에 두면 소름이 돋아 말을
할 수가 없어. 자, 구차한 사연은 더 묻지 말고 그냥 저 아가씨에게 오늘 검은
장미는 어느 시장에 나느냐고 물어봐. 만일 순순히 답해 주면 시장 문을 언제
여느냐도 물어보고. "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 기숙사 대표로 뽑혀 교장 선생님에게 요새 감자 크
기가 줄어들었다며 항의문을 전달했다가 휴지통으로 두들겨 맞았다거나 친구의
연예편지를 품고서 한밤 산중을 달려가 까막눈인 숯 굽는 집 딸 앞에서 편지를
읽어준다거나 근처 숲속에서 동급생들이 따온 알지 못하는 열매나 이상한 색깔
의 버섯을 시범 삼아 먹어보는 일 따위들 말이다.
나는 주의를 꽃파는 아가씨에게로 돌렸다. 기둥에 내건 등불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권하고 있었다. 몇 마디의 단어들이
내 귀속으로 들어 왔다.
"나비들이...거절......향기...."
"...블루 로즈..."
"...아델 강가.....엘프의 추억..."
"달이 졌다. "
사내는 장미꽃 세 송이를 받아 들었고 바구니 속에 동전을 넣었다. 꽃파는 아
가씨는 몸을 돌렸고 나와 시선이 맞았다. 나는 흠칫했지만 꽃파는 아가씨는 입
가에 미소를 짓고는 나와 맥머피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깡마른 몸매에 빨간 색 루즈만 살짝 바른 수수한 화장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활기찬 기운이 전신에 흐르고 있어 그녀가 들고 있는 장미꽃 바구니와 더불어
잘 어울려 보였다.
"꽃 사주시겠어요? "
나는 은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두 송이만. "
꽃파는 아가씨는 스카렛 장미 두 송이를 집어들었다. 나는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런. 코발트 푸른색 장미는 없어요? "
"예엣? "
"아까 저 쪽에서 블루 로즈 운운하는 것 같아서... "
꽃파는 아가씨는 똑똑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시원스럽게 밝아서 거울과도
같았다. 그 눈을 가지고서 꽃파는 아가씨는 나를 한참동안 보았다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푸른색 장미는 존재하지 않아요. 많은 화훼업자들이 시
도했지만 실패했지요. 다만 전설이 있어요. 한 유랑 기사가 드래곤에게서 푸른
색 장미를 얻어다가 여왕에게 받친 공로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요. "
그거야 나도 잘 알고 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보일드 공작가문이 바로 그 유랑 기사로부터 비롯됐다고 하니깐. 지금은 몰락해
서 사촌도 없고 팔촌도 없이 집도 밭도 없이 나 혼자 외톨이지만 붉은 드래곤과
푸른색 장미가 그려진 방패는 우리집 가문의 문장이다.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사치스러운 글귀까지 합쳐서 팔만 사천개는 충분히 될 것 같은 이
나라 귀족들의 널여있는 문장 중에 하나다.
"아마도 잘못 들으신 것 같네요. 몰라도 블랙 로즈라고 말하는 것을 블루 로즈
로 들으신 거겠죠. "
"아, 그런가요. 그러면 검은 장미는 어느 시장에서 나죠? "
꽃파는 아가씨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매끈한 볼에 옴폭 보조개가 맺혔다.
"장미는 밭에서 나지 시장에서 나는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요새는 시장에서
검은 장미를 잘 볼 수가 없어요. 중앙 시장만이 아니라 다른 외곽의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도매상 아저씨의 이야기로는 검은 장미를 구할려면 이웃 나라까
지 가서 구해와야 한데요. 더 이상 메트로 근교의 화훼업자들은 검은 장미를 키
우지 않는데요. "
맥머피가 탁자 밑에서 내 정강이를 찼다. 나는 고민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니 그만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더 질문하라는 뜻인가?
"그러면 만일 검은 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시장에 가면 비싸게 팔 수 있겠
네요. 시장 문은 몇 시에 열죠? "
꽃파는 아가씨의 동공에서 반짝 영롱한 빛이 발했다. 보조개 또한 더욱 깊어졌
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빛은 사라졌고 보조개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굳이 시장까지 갈 필요도 없을 거예요. 가까운 꽃가게를 찾아가도 되
죠. 어차피 다 도매상과 연결되었으니깐.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는 고객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시죠? 메트로에서 검은 장미는 금방 시든다는 것. "
나는 모르면서도 눈꺼풀을 깜박 닫았다 열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그냥 빨간 장미 두 송이만 주세요. "
나는 은화를 꽃파는 아가씨 앞으로 더욱 깊숙이 밀었다. 꽃파는 아가씨는 내가
내민 테이블 위의 은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이없어 하는 눈치였다. 나
는 말했다.
"거스름돈이 모자라나요? "
꽃파는 아가씨는 내 말에 펭귄을 웃기려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은화를 다시 내 앞으로 밀었다.
"이 장미꽃은 아주 특별한 장미랍니다. 평범한 은화로는 살 수 없는 꽃이죠. "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꽃파는 아가씨가 들고 있는 장미꽃을 유심히 살펴보았
다. 그것은 장미꽃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묘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나는 점차 불편해져 갔다. 그 때 맥머피가
헛기침을 했다.
꽃파는 아가씨는 움찔 깜짝 놀랐다. 비로소 내 앞에 앉아 있는 맥머피의 존재
를 깨달은 듯 했다. 그녀는 맥머피를 노려보았다. 볼이 약간 부풀어오르는 것이
화가 난 기색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장미 두 송이를 내려놓으며 나한테 약간 고개를 수그리고
인사를 했다.
"저의 실수이군요. 이번 거래는 외상으로 해두기로 하죠. 기억해 두세요. 당신
은 저한테 빚을 졌어요. "
빚?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그녀는 맥머피와 내가 앉은 테이블에 등을 돌려 총
총히 술집을 나섰다.
땡,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흔들거리며 문이 닫히자 맥머피는 요란하게 웃어댔
다.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났다.
"하하하 잘했어 잘했어 하하하. 너, 저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나? "
"모르겠습니다. 꽃파는 처녀 아닌가요? "
"아니지, 그것은 위장이고 진정한 정체는 경찰 끄나풀이야. "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경찰 끄나풀? "
"아울러 범죄자들의 첩자이기도 하지. 가끔 중요한 경찰정보를 범죄자에게 넘
긴다네. 한마디로 이중첩자. 조금만 이 바닥에서 박박 기어 본 업자들은 다 저
애를 알지. 저 애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범죄자와 경찰들이 있거든. 곧 일거
리를 몰고 다닌다는 얘기지. "
내 가슴 한쪽 구석이 불편해 졌다.
"그런데 아까 외상으로 해둔다는 꽃파는 아가씨의 말은 뭐죠? 또 특별한 장미
라는 소리는? "
맥머피는 혀를 찼다.
"이런, 장미는 위장 이랬잖아. 그 아가씨는 이중 간세야. 그 애가 취급하는 게
뭐겠나? 그래 정보지. 질문 하나 당 금화 두 냥을 줘야해. 저 애가 유명한 것은
정보의 질을 따지지 않아서지. 에스테이트 후작이 아침 식사로 꿀을 바른 크로
와상을 먹는다는 정보도 금화 두 냥, 타일러 백작이 정원에다가 파묻은 금괴의
위치도 금화 두 냥이지. 정보는 생산자에만 있어서는 가치가 없어. 정보는 소비
될 때 값을 발하는 법이지. "
나는 맥머피의 말을 도중에서 끊고 탁자 위의 은화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은화 한 닢만 주었잖아요. "
"오호 그랬지. "
맥머피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건 간단해. 너는 나에게 속은 거야. 너를 꼭 속이고 싶어서 속인 것이 아니
라 그 아가씨를 속이려다 보니 너를 이용한 거지. 알고 있나? 너의 얼굴은 아주
순진해 보여. 정의감, 책임감, 윤리의식 등이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고, 그
래서 처음 보는 사람도 너를 쉽게 믿게 되지. "
맥머피의 목소리에는 반쯤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왜 그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던 거죠? "
"후후, 나는 패션은 첨단의 것을 즐기지만 사고방식은 구식이야. 나는 지적재
산권이라든가 특허권이나 저작권이라든가를 이해할 수가 없어. 화폐와 마찬가지
로 지식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흐르고 흐르는 것이지. 책값이 그 지식의 값에
비례하는 것을 봤나? 그 종이뭉치값에 비례하지. "
맥머피는 그의 주장을 글로 옮겨 책을 출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도서관에도
몇 부 갖다 놓으면 불법출판하는 사람들이 보고 양심의 위안을 얻을 지 모르겠
다.
"그러나 당신은 그녀가 정보의 질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 말은... "
"맞아, 하지만 몇 마디의 말을 지저귀는데 금화 두 냥이라, 대체 그런 장사가
어디 있나. 은화 한 닢이 정확한 값어치지. 내가 사람을 죽여가며 자네를 경호
한 대가가 금화 한 냥이야. "
맥머피는 장미꽃 하나를 집어들고 꽃잎을 부수어 드렸다.
"그렇다면 무관심하면 되잖아요. 나까지 끌어들이며 그 아가씨를 속일 필요가
뭐가 있죠? "
"너는 무슨 재미로 사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무언가? 바로 속고 속이
는 인생의 맛이야. 귀족 행세하며 촌아가씨를 유혹하는 재미, 사기쳐서 졸부를
알거지로 만드는 재미, 도박장에서 실력없는 척 하다가 막판에 왕창 따 먹는 재
미. 너는 오늘밤에 죽을 사람이잖아. 이 재미를 모르고 죽다니 아쉽지 않아? 어
차피 죽으면 모든 부채 관계가 소멸되잖아. 그 찌푸린 얼굴을 좀 펴. 이제 곧
또 다른 구경거리가 펼쳐질 테니. "
맥머피는 손바닥을 펴고 모아진 장미꽃잎을 내 얼굴에다가 후 불었다. 내 코앞
에서 장미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땡, 종소리가 남과 동시에 별안간 폭음이 내 귓가를 때렸다. 하얀
연기가 확 밀려왔다. 맥머피는 내 어깨를 붙잡아 벽쪽으로 밀려 세웠다.
"자식들, 연막탄을 준비했다니, 오기노! "
"예. 부장님. "
대답과 함께 바람이 연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연기의 틈 사이로 주황색
제복을 입고 칼을 뽑아든 일군의 사내들이 보였다. 메트로 경시청 소속의 경찰
들이었다. 그리고 두 손을 길게 뻗어 휘젓고 있는 탁한 회색 두건을 쓴 남자가
보였다.
맥머피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경찰의 풍마술사야. "
풍마술사(風魔術士).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술사들. 불을 다루는 화염술
사(火焰術士)와 물을 다루는 수격술사(水擊術士)와 더불어 고대의 마법사의 흔
적들이다. 태풍과 폭풍의 피해가 잦은 세레미아 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풍마술
사들이 우대되었고 많은 수의 풍마술사들이 영주의 성과 중앙의 관계에 진출해
있었다.
과거 나는 황소들을 끝없이 집어삼키던 트위스터에 맞싸우던 풍마술사를 본 적
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선명한 흰색의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오기노라
고 불린 이 남자는 탁한 회색의 두건이다. 풍마술사들은 흰색에 가까워질수록
그 능력이 높다고 들었다. 나는 이 남자의 능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술집의 2층에서는 칼들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러자 1층에 모여 서 있
던 경찰들이 우르르 2층으로 올라갔다. 연기의 상당부분이 걷히자 술집 손님들
이 술잔을 붙들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은 없었다. 서로의 술잔을 대고 건배를 하며 활극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노란색 마후라를 걸친 경찰 한 명이 목제 난간을 부수며 1층으로 떨어졌다. 손
님은 오 하며 감탄음을 내질렀고 풍마술사는 손을 뻗어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경찰이 공중에 붕붕 뜨는 장면을 기대했지만 그 정도의 실력은 없는 모양이었
다. 경찰은 약간 멈칫 하더니 그대로 탁자 위로 추락했다. 손님들은 일제히 에
이 하고 실망을 표시했다. 오기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나는 벽에서 몸을 떼어 2층을 살폈다. 경찰과 싸우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은 모
두 검정색 박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검술 솜씨보다는 훨씬 위에 있
는지 여유있게 경찰들을 계단과 난간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
어 있는 손님들 중에 댄디나 법원 서기가 없음을 확인했다. 꽃파는 아가씨에게
꽃을 샀던 사내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 한 명이 또 계단을 굴러 1층으로 떨어졌으나 오기노는 손을 뻗지 않고 외
면해 버렸다. 손님들 중 턱수염 장한이 부라보를 외쳤다. 박쥐 마스크들은 칼등
으로 경찰의 급소를 내리칠 뿐 살상을 할 의도는 없는 모양이었다. 경찰 간부의
상징인 깃털달린 모자를 쓴 부장은 맹렬히 칼날을 내리 치고 있었지만 황색 망
토를 걸친 상대는 짤막한 단검을 들고서 받아넘기고 있었다.
박쥐 마스크들은 경찰 두 명을 발로 걷어찼고 난간을 부수며 그들은 떨어졌다.
그들은 머리부터 떨어지는 자세여서 위험했다. 손님들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
다. 때에-. 종소리가 울리다 멈췄고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고막이 아파왔
다. 손님들은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술집의 홀의 한 가운데에는 하얀 두건을 쓴 하얀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고 경
찰 두 명이 2층에서 천천히 낙하를 계속했다. 경찰의 몸이 지면에 닿자 가슴을
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고막의 고통도 사라졌다.
"사부님! "
"멍청한 녀석, 아직 네 실력으로는 절대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아직은 자연의 바람을 빌려야 하는 시기란 말이다. "
하얀 두건의 풍마술사는 꾸지람을 내렸고 오기노는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
"대존사! 도와주시오. 이들은 황제에 도전하는 반적들이오. "
2층에서 경찰들은 한데 뭉쳐 방어에만 힘쓰고 있었다.
"흥, 내 힘을 빌리려거든 정식으로 판사의 영장을 받아와야 된다는 것을 모르
시오? "
대존사라고 불린 하얀 두건의 풍마술사는 뒷짐을 서고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
다.
"맞소, 정부의 관리라면 엄연히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법이요, "
황색 망토의 박쥐 마스크가 박수하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관리가 아니다. 황제의 식객일 뿐이지. "
대존사는 냉소하며 싸움 중에 튕겨져 나가는 경찰의 칼에 대고 직풍을 일으켰
다. 카운터의 주인에게 곧장 날아가던 칼은 방향을 바꾸어 기둥에다가 박혔다.
"아차, 실례했소이다. 바람은 매인 곳이 없이 혼자서 가는 법이라는 것을 깜박
했소이다.
황색 망토의 박쥐 마스크는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경시청의 부장은 얼굴
이 부락부락 해진 채 바삐 칼을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집 주인은 깨끗한
은잔과 비장해둔 술병을 꺼내 대존사에게 따라 주었다. 손님들은 위하여를 외치
며 건배를 하고는 술을 마셨다.
경찰 한 명이 또 다시 난간에서 떨어졌고 대존사는 역풍을 일으켜 받아냈다.
손님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
"대존사! 우리 집에는 56년도 산 포도주가 있소이다. 내 나중에 꼭 사례할테이
니 도와주시오! "
경시청의 부장을 악을 썼다. 이에 황색 망토의 박쥐 마스크는 술집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장, 지하실에 있는 32년도 제르맹산 포도주. 그거 대존사께 갖다 드리시
오. 지불은 외상으로 하고. 나중에 혁명정부가 들어서면 갚겠소. "
"이 반역자들! "
경시청의 부장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박쥐 마스크를 한 무리들은 사회진화주의자들이 분명했다. 유기체의 진화와
버금하는 사회구성체의 진화를 꿈꾸는 무리들. 이들의 세계관에서 사회는 하나
의 유기체적 기계체계하에서 통일되어 있다. '각자는 출생이 아니라 능력에 따
라서 일이 주어지고, 각 능력에는 그 노동에 따라 보수가 주어진다. ' ' 정권은
산업가에게 교권은 학자에게' 등이 이들의 구호였고 엘리트에 의한 효율적인 사
회지도를 주장하였다. 이들의 시각에서 귀족과 황제들은 엘리트가 아니였고 사
회진화를 가로막는 녹슨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황제 타도를 내세우
며 공공연히 반란을 기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출신성분을 따져보면 상당수가 상류귀족의 자제들이었고 그 지
적 세련됨은 사교계에서 매혹과 공감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황제의 권력
은 몰락중이었다. 메트로의 시민들은 사회진화주의자들와 경찰들의 대립을 삶의
활력소로 삼았다. 경찰들이 늘상 황제의 제 일대 적 사회진화주의자들이라고 주
장하지만 시민들은 도둑이나 제대로 잡으라고 코웃음칠 뿐이다.
박쥐 마스크들은 경시청 부장을 마지막으로 경찰들을 모두 밀어냈고 손님들의
갈채를 받은 후 2층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술집 주인과 경시청 부장은 손해배
상 문제로 대판 싸웠고 손님들은 뒤집어진 테이블을 바로 하고 덤덤하게 술을
마셨다. 대존사는 제자에게 술통을 짊어지게 하고는 문을 나섰다.
맥주를 한잔 더 마신 후에 맥머피와 나는 헤어졌다. 나는 은화 한 닢을 맥머피
에게 되돌려 주려 했지만 맥머피는 거절하였다.
"그건 자네가 힘들게 번 돈이야. 돈을 무시하지 말게나. 세상에는 금화 한 냥
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숱하게 깔려 있어. 여자아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은화 한 닢이라면 괜찮은 벌이잖아? "
맥머피는 억지로 내 손에다가 은화를 꼬옥 쥐어 주었다. 나는 맥머피에게 다짐
했다.
"아뇨. 이 은화는 꽃을 사기 위해 내가 당신에게 빚진 거예요. 그리고 꽃파는
아가씨에게 빚진 금화는 세상의 쓴 맛에 대한 수업료로 여기죠. 꼭 갚겠어요. "
"하하하, 천천히 갚게나. 네 부친의 빚을 모두 갚거든 말야. "
맥머피는 내 뺨에다가 침을 튀기며 인사를 고하고는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장미꽃 하나를 들고 멍하니 서 있다가 내 발을 밟고 지나간 검객 덕택에
퍼뜩 깨어났다. 검객은 건방지게 길을 막고 서 있다고 눈을 부라렸고 나는 미안
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검객의 옆구리에는 가슴이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은 여
자가 붙어 있었고 내 미안함에 그 콧대가 더욱 하늘 높이 솟는 듯 했다.
나는 거리의 인파 속에서 섞여 그저 걸었다. 하늘에는 태양때문에 그 빛이 식
어진 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을 보고 보고 있으려니 미친 사람이 나를 붙잡고 물
었다.
"바다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요? "
나는 대충 아무 방향이나 손을 들어 가리켜 보았다. 하지만 그 미친 사람은 갑
자기 바다에 대한 열정은 식고 내 장미꽃에 대해 탐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내 장미꽃을 주시했다.
"가지고 싶으세요? 가져요. "
나는 장미꽃을 그에게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그 미친사람은 별안간 무릎을 꿇
더니 천지신명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는 악마가 나타난 듯이 주문을
외우고는 나를 저주하였다.
나는 그 저주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걸었다.
몇 시간을 걷자 거리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나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육체
를 이끌고 쉴 곳을 찾았다.
몇 블럭을 지나가 이윽고 나는 예언자 광장의 분수대 벤치에서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한 손에는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나는 관청의 업무마감 시간 직전에 법
원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들어가서 보일드 가문의 후계자임을 선언하고 서류 몇
장에 사인을 하고는 허울 좋은 공작 작위를 계승할 것이다.
그러면 호적 상의 내 신분은 평민에서 귀족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
는 80살난 할아버지라도 상대가 평민이라면 반말을 할 수가 있고 극장에서 좋은
자리를 앉은 부르조아를 내쫓고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황제의 궁전에 출입
을 하며 백작의 딸과 춤을 출 수가 있다.
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상류귀족이 아니
라 영지도 저택도 없는 몰락귀족인 것이다.
상류귀족의 자제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사나 자작의 작위가 주어진다. 황제의
특명으로 배려되어 진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귀족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
지 귀족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몰락귀족들은 작위를 가진 아버지나 삼촌이 죽어야 귀족이 된다. 지방
의 한심한 몰락귀족들은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서로를 남작이
니 후작이니 부르고 그 자식들은 개울가에서 가재나 잡고 산에서 나무나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외나무 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면 하루아침
에 귀족이 되는 것이다.
검술도 배운 바 없고 말을 탈 줄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은 남의 도움을 빌어 간
신히 쓰는 귀족들. 그들이 바로 몰락귀족인 것이다. 신분은 재산과 달리 상속을
포기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아무리 거부를 한다해도 소용이 없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몰락귀족으로 일반화된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작위를 승계한 순
간부터 나를 비웃을 것이다.
그와 나는 대략 두 시간동안 아무 하는 일없이, 그는 서 있었고 나는 앉아 있
었다.
그는 길다란 작살을 등에 매달고 있었고 검정색 실크햇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다. 그는 마치 분수대의 조각상들의 일부인 양 서 있었다. 하지만 터프한
메트로의 시민들은 그에게 하등의 관심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고층건물이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는 메트로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어깨와 탄탄한 다리는 그가 이곳 메트로와는 무관한 인물임을 단적
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샹들리에가 켜진 살롱과 카페에서 재치 있는 여주인과
더불어 담소를 나누는 풍경화의 어느 곳에도 그를 집어넣을 공간은 없었다.
그에게는 거친 파도가 넘실거리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대양이 어울렸다. 보트의
이물에 서서 강철작살을 밀향고래를 향하여 던지는 일급 작살수. 고래의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고 공기가 아닌 바람으로 호흡을 하는 자연인. 밤하늘의 별과 달
을 보며 자신의 배가 나아갈 곳을 예측하는 뱃사람으로서 그가 있을 곳은 바다
인 것처럼 보였다.
흔들리지 않는 땅은 그에게 너무 어색하다. 무책임하게 지어진 건물과 그 사이
에서 이그러진 길은 그에게 방향감각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서 있
다. 한 손에는 지도처럼 보이는 양피지를 들고서. 황제의 애인의 이름이나 양민
을 학살한 장군의 이름이 붙여진 길의 이름을 무심히 들여다보면서 그가 가야할
곳을 몰라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바다로 가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지? "
아까의 미친놈이 흘러 들어와 이번에는 이 작살수에게 물었다. 작살수는 천천
히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뺨에는 어두운 보랏빛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야만인이었다. 아마도 남양의 어느 곳에서 자라나 축제 때면 인육을 즐겼을 식
인종이었을 지도 몰랐다.
야만인 작살수는 얼굴을 들어 태양을 가리켜 보였다.
"고마워. "
미친놈은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태양이 지는 쪽, 서쪽으로 향했다.
"꼭 보러 오세요. 이번에 여배우를 새로 교체했거든요. "
벤치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자 교활하게 생긴 소년이 팜플렛을 건네며 연극을
보러 오라고 권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이었다. 그런데 팜플렛에는 아름다운 여
성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젊은 신인이에요. 솔직히 말해 연기는 못하지만 얼굴과 몸매는 예뻐요. 무엇
보다도 가슴이 죽여주죠. "
나는 다시 팜플렛을 보았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제목이 조그맣게 붙여져 있
었다. 그에 반해 '현대적으로 각색'이라는 문안은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문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소년에게서 할인 초대권을 받아 들었다. 은화 한 닢이면 거스름돈까지 받
을 수 있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야만인 작살수는 여전히 서 있을 태세
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팜플렛에 그려진 약도 속의 대학로를 찾아 예언자 광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이런 공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통파 셰익스피어 극단입니다. "
내가 들고 온 할인 초대권은 극장 입구의 지배인 손에서 구겨져 버렸다. 베니
스의 상인이라는 입간판만을 보고 들어온 것이 실수였다. 어쩐지 입장객이 너무
적더라니깐.
지배인은 입을 앙 다물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눈에 힘을 주었고 나는 머리를
그적이며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그럼, 그냥 보죠. 표 한 장 주세요. "
무대 막이 오를 시각이 20분 정도 남았다는 데 극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
는 2층으로 올라가 유리문을 열고 휴게실 야외 베란다로 건너가 보았다. 늙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관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건물 맞은편 비좁은 골목에는 사람들이 길다랗게 줄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대적으로 각색-베니스의 상인' 이라는 플랭카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갑자기 줄은 선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안이 비치는 투명한 옷을 걸친 여배
우가 마차에서 내려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나는 안타까움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또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서 불시착
한 것이다.
내가 들어섰을 때는 극장 안은 깜깜해 있었고 연극은 막이 오른 상태였다.
"학교 시절 얘기네만, 화살을 하나 잃으면 난 화살을 찾기 위해 다른 화살을
같은 높이와 같은 방향으로 좀 더 신중히 겨냥하고 쏜 일이 있네. 이렇게 모험
을 한 뒤에 둘을 다 찾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런 어릴 적 경험을 말하
는 이유는... 자네한테 진 빚도 많은데 괘씸한 말 같지만 그 빚은 떼인 셈치게.
그러나 하나만 더 첫번과 같은 방향으로 화살을 쏘아준다면, 과녁은 내가 잘 눈
여겨 둘 것이니까, 틀림없이 둘 다 찾게 되든가, 적어도 나중 것만은 찾아와서
다행히도 처음 것에 대한 채무 밖에 남지 않게 될 것 아닌가. "
무대에서는 사치스러운 낭비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바사니오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미모의 상속녀 포오샤에 대한 구혼자금을 절친한 벗인 안토니
오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괜찮은 인생작전같았다. 무일푼 이하인-빚도 졌으니- 처지에서 거액
의 상속녀를 유혹하여 결혼하는 방법. 거기다가 상대는 황금양털같은 머리다발
이 이마에 늘어져 있는 미모의 소유자라지 않는가.
나는 손을 내밀어 더듬거리며 객석 중앙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고물의자가 이 극단의 사정을 말해주는 듯 했다. 어디가나 정통파는 춥
고 배고프다.
"이보시오, 샤일록씨. 난 금전거래는 이자없이 해왔소만, 이 친구가 급히 필요
하다니까 이번만은 관습을 깨뜨리겠소. "
안토니오의 말이다. 자신의 전재산이 배에 실려 해외를 떠돌고 있어 당장 수중
에 돈이 없는 안토니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와 바사니오에게
빌려줄 돈을 청하고 있었다.
"글쎄요, 아무튼 나는 돈도 새끼치게 합니다. "
툴툴대는 샤일록.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는 이자놀이를 하지 않는다. 교리와 율법에 어긋나
기 때문이다. 이자를 받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 하지만 금융업이란 경제에서 필
수적이다. 장롱 속에 쌓아둔 돈은 썩어갈 뿐이다. 돈은 돌아야 한다. 그래서 중
세 유태인들은 지옥에 가기 싫어하는 그리스도교도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담담
해 왔다. 그러다가 프로테스탄트가 부의 축적을 긍정하면서 일대 경쟁이 시작되
지만.
나는 바사니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샤일록을 욕했다.
아, 고리대금업자들이 없었다면 내 아버지도 돈을 함부러 못 빌렸을 테고 부채
도 천문학적인 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내 인생도 시골 학교의 교사
노릇을 하며 코흘리개들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며 늙어갈 수 있을 텐데...
"사랑이 자라는 곳은 어디인가?
가슴 속 깊은 덴가, 머리속인가?
어떻게 태어나 뭘 먹고 자라나?
들려다오, 들려다오
사랑이 자라는 곳, 사람의 눈 속,
눈 속에서 자라지만 금방 죽어 버리네...... "
그런데 나는 포오샤로 분장한 배우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일단 여배우
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세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에서는 여배우를 쓰지 않고 변
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을 여장시켜 썼었고 이 연극이 정통파임을 내세운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한 것이다.
나는 건너 편 극장의 시스루 옷을 걸친 그 여배우의 몸매를 떠올리며 포오샤에
게 구혼하는 일단의 무리들의 행각을 지켜보았다.
제 3막이 오르고 딸의 가출과 안토니오의 파산 소식을 접한 샤일록은 또 독설
을 퍼부었다.
"... 그 자식은 날 모욕하고, 오십만 더커트나 이익 볼 것을 방해했어. 그리고
내가 손해를 보면 조소하고, 이익을 보면 조롱했지. 우리 민족을 멸시하고, 내
거래를 방해 놓았것다. 친구는 떼놓고, 원수는 충동질했것다. 대체 무슨 까닭
에?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지. 그래 유태인은 눈이 없나? 아니 유태인은 오장
이, 육체가, 감각이, 감정이, 정열이 없단 말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연
장에 다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에 낫고, 겨울엔 춥고, 여름에 더워.
어디가 예수장이들과 다르단 말인가? 찔려도 우린 피가 안 난다 말인가? 간질여
도 웃지 않는단 말인가? 딴 것들이 죄 당신네 한가지라면 이 일에 있어서도 한
가지일 것이 아니오. 가령 유태인이 그리스도교를 모욕했다고 합시다. 그리스도
교도의 관용이 뭐겠소. 복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도가 유태인을 모욕한 경
우, 그리스도교를 본뜬다면 유태인은 어떤 인내를 해야 옳겠소? 물론 복수요.
당신네들이 가르쳐 준 악행을 나도 실행하겠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교훈
이상으로 철저히 실행하겠어. "
글쎄, 나는 한끼 식사로 감자 두 개를 먹었고 맨손으로 흙을 파다 손톱이 빠졌
고 못 먹어 생긴 위장병에 시달리고 감기에 걸리면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견
뎌야 했다.
"가장 무거운 화장을 하는 여자일수록 가장 가벼운 여자란 말이야. 이름난 미
인의 머리에서 바람과 음탕하게 희롱하고 있는 저 뱀 같은 황금의 고수머리칼
도, 알고 보면 죽은 사람 머리의 유물이고, 그 금발의 주인공은 해골이 되어 무
덤에 누워 있는 수도 흔하지 않은가? "
바사니오는 고민 중이다. 포오샤의 아버지는 금과 은과 납의 세 궤를 마련해서
그 중 하나에다가 포오샤의 초상을 넣고는 그 초상이 든 궤를 선택한 구혼자와
포오샤를 결혼시키라고 유언을 하고는 죽었다.
첫번째 금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만인이 소망하는 것을 얻으리라>라는 글귀
가 적혀 있고 두번째 은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신분에 응당한 것을 얻으리
라>, 세번째 납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전 재산을 내놓고 운명에 걸게 되리
라>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포오샤는 아버지의 유언을 성실히 지켰고 모로코 왕, 아라곤 왕들은 헛된 선택
을 하고는 되돌아갔다. 이제 바사니오 차례다.
내가 만일 저 자리에 섰다면 어쨌을까. 흐음. 간단하다. 나는 산신령과 나무꾼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납궤를 선택하겠다.
만인이 소망하는 것? 갓난아기는 엄마 젖을 보채고 병든 자는 건강한 몸을 원
한다. 젋은 남녀는 서로의 짝을 원하고 곧 죽을 자는 연장된 수명을 원한다. 도
대체 만인이 원하는 것이란 무얼까?
신분에 응당한 것? 몰락귀족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준다고 하여도
나는 거절하겠다.
전 재산을 내놓고 운명에 걸겠다. 바로 이것이다. 내 재산, 즉 빚도 재산이니
깐, 내놓으라면 '고맙습니다' 하고 내놓고 타인의 운명이 아닌 내 운명에 거는
것이다.
"포오샤, 애당초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나는 솔직히 말했지만, 내 혈관 속에서
흐르는 피가 내 전 재산이오. "
멋진 말이다, 바사니오. 미인도 차지하고 재산도 얻고 저렇게 멋진 대사도 하
고. 좋겠다. 다만 지금 당신 친구가 위험한 지경에 상태에 빠졌다네. 샤일록이
일 파운드의 살을 얻기 위해 칼을 삭삭 갈고 있다네.
하지만 미인인데다가 똑똑하기까지한 포오샤가 나서자 금방 해결되었다.
"이 증서에는 한 방울의 피도 당신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소. 여기 쓰인 말은
분명히 '살 일 파운드'요. 자, 증서대로 살 일 파운드를 떼여 가지시오. 그러나
베어낼 때에 만약 그리스도 교도의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당신의 토
지 재산은 베니스의 국법에 의하여 베니스 국에 몰수당하오. "
"그것이 법률이오? "
하하하. 이 고리대금업자놈. 그것이 법률이다 마. 왜 드러커는 내 아버지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살 일 파운드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아니오, 내 생명이고 뭐고 죄다 가져가 버리시오. 감형은 필요없소. 집을 떠
받치는 기둥을 빼가 버리면 집 전체를 빼가버리는 거나 한가지가 아니오. 생계
를 유지하는 재산을 빼앗아가버리면 생명을 빼앗는 거나 매 한가지가 아니오. "
그런데 내가 샤일록의 몰락에 마냥 즐거워 하고 있을 때에 옆 좌석에서 훌쩍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는 소리다.
나는 깜짝 놀랐다. 먼저 내 옆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내
옆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물체가 어른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이 말로
만 듣던 오페라의 유령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나는 시력을 돋구며 눈을 크게 떴다. 여자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울고 있다는 것에 또 놀랐다. 이건 베니스의 상인이
다. 오델로도 아니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다. 이건 희극이다.
그리고 나는 여자아이가 예쁘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냈
다. 드러커 집안의 집사가 챙겨준 옷의 앞주머니에는 비단손수건이 들어 있었
다.
"흑흑흑. 고마워요. "
여자아이는 내 손수건을 받아들고 감사를 표시했다. 나도 드러커 집안의 집사
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저 늙은 사람이 너무 불쌍해요. 흑흑흑. "
여자아이는 시종 내가 저주해온 샤일록을 가리키며 동정심을 표시했다. 샤일록
은 축 어깨를 늘어뜨린 채 법정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
재산의 반은 국고에 들어가 버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딸을 훔쳐간 사내에게 넘
어가게 된 샤일록. 게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증서를 작성해야 했고 그
토록 미워했던 안토니오에게 은혜를 입어야 했다. 자신의 정체성인 자존심을 잃
어버리고 온통 흔들려버린 나이든 남자.
불쌍하군. 나는 여자아이의 울음에 전염돼 감정이 동요했다. 성장기를 온통 구
박과 멸시 속에서 자라온 나는 남들이 할퀴어 버린 자존심을 붙들고 얼마나 울
었던가. 불현듯 옛 생각에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내 몸에 가해지는 폭력에 맞
서서 나는 신음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으로, 울지 않는 것으로, 고통을 인내하는
것으로 반항하려 했다. 내가 울 수 있는 날은 오직 비가 내리는 날 뿐이었다.
빗물이 내 눈가에 와 닿을 때 나는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연극은 끝나 버리고 막은 내렸다. 나는 볼에 눈물자국이 있는 여자아이
와 함께 극장문을 나섰다. 거리에는 행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
는 여자아이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여자아
이의 이름은 백화였다. 나는 길을 걸으며 뭔가 재미있는 화젯거리를 찾으려 애
를 썼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메뚜기나 개구리 요리법에 메트로의 아가씨가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했다. 내 아버지가 다크 보
일드라는 사실과 지금 관청에 상속 신고를 하러 간다는 얘기를 했다.
역시 다크 보일드라는 단어의 위력은 컸다. 백화는 나에게 내 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몰락귀족의 처지를 벗어나려 했
던 할아버지의 노력을 무참히 뭉개버렸던 인물이라는 답에서 벗어날 여지가 없
었다. 백화는 나에게 아버지가 지었다는 시를 들려주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나에게는 백화의 목소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나는 기숙 학교의 뒤편으로 솟아 있던 만년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백화는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가 꼭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오늘밤에 죽을 것인데 못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관청 문 닫을 시간 아닌가요? "
백화는 나를 걱정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내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솔직히 나는 이 여자아이와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상속승계 신고를 하려면 시청에 가야 하나요? "
"아닙니다. 저는 귀족청에 가야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법률적으로는 귀족이지
요. "
돈도 없고 권력도 없으면서 허영심과 자만심과 가득한 족속들이 몰락귀족들이
다. 당연히 아가씨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혼인 상대로도 31위인 말구종보다
한 단계 위인 30위다.
하지만 백화는 크게 개이치 않는 표정이었다.
"귀족청이라, 거기서 근무하는 관료들은 맘에 들지 않지만, 나, 귀족청의 정원
은 좋아해요. 큼지막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심어진 오솔길이 있죠. "
마침 귀족청은 돌아가는 길에 있다고 백화는 말했다. 백화와 나는 쇠창살이 심
어진 관공서 담벼락을 길게 따라가다가 엔젤리스 공원으로 들어갔다. 아스트랄
선대황제가 자신의 수호천사에게 봉헌한 공원이다. 공식명칭은 아스트랄스 가디
언 엔젤 페킨파 공원이었지만 시민들은 엔젤리스 공원으로 불렀다. 관청가의 중
심에 위치한 공원이기에 쿠데타가 일어나면 병사들의 집결지가 되곤 했다. 이곳
의 나무들이 울창한 까닭은 피를 먹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귀족청의 후문은 공원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어서인지
철문은 녹슨 채 잠겨 있었다. 나는 몇 번 세게 철문을 걷어차 보았지만 소용없
었다. 백화는 담쟁이 덩굴이 수북히 덮힌 담장을 살피더니 틈새에 끼인 열쇠를
찾아 냈다.
"어릴 적에 내가 숨긴 열쇠예요. "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백화와 나는 그 열쇠로 철문을 열고 귀족청의 후원에
들어섰다. 자그마한 물줄기들이 샘솟는 분수대을 지나 백화와 나는 서로가 알고
있는 나비의 이름을 차례로 대어가며 오솔길을 걸어갔다.
내가 알고 있는 나비의 이름이 밑천이 떨어질 즈음해서 진홍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나타났다. 백화는 익숙하게 앞장을 섰다. 진홍 건물을 돌아서자 웅장한
석조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대리석 블럭을 깔아 놓은 보도와 어두운 회랑을 지나 귀족청의 현관에
들어섰다. 장중한 중앙홀은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일하는 관료들은 벌써 퇴
근해 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순찰을 도는 수위라도 찾고자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벽에는 선대 황제들의 초상화와 군기들이 걸려 있었고 우리들은 긴 황제
가의 역사에서 유일한 여왕이었던, 흔히 에머랄드 여왕이라고 알려진, 다이아나
여왕의 초상화 앞에 서서 그녀의 손에 들려진 푸른 장미를 보았다. 나는 백화에
게 보일드 공작 가문의 근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생생히 향기를 내뿜으며 영원히 시들지 않고 살아있는 장미. 자연 섭리의
힘을 빗겨간 마법의 장미. 유한생명을 한탄하게 만드는 불멸의 장미. "
보일드 공작 가문이 몰락하게 된 원인도 이 장미에 있었다. 왕가에 대대로 전
해 오던 푸른 장미가, 제국 선포를 하고 황제로의 즉위를 했던 아스트랄 대에
이르러 분실되었던 것이다. 신황제는 보일드 공작 가문에 푸른 장미를 찾을 것
을 명했고 그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제 생각으로는 그것만이 원인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보일드
가문은 왕자가 아닌 공주에게 봉신하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푸른 장미는 여왕
이후에는 공주에서 공주로 전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적자상속을 택한 왕위 계승
도처럼 간단하지가 않죠. 그 복잡성과 소유권 다툼 속에서 푸른 장미는 잃어버
린 것이죠. 그리고 우리 보일드가도 아스트랄 황제 이후 권력에서 소외되어간
뭇 공주처럼 영락하게 되었죠. "
눅눅해진 역사책을 더듬어 보면 푸른 장미를 둘러싼 공주들 간의 쟁탈전이 대
단했다. 그 싸움에 보일드가도 말려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공주에게
봉신해 친족상잔의 비극을 자초하곤 했다.
백화는 한참동안 고개를 든 채 푸른 장미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장미에게 무슨 특별한 힘이 있었나요? 붉은 드래곤의 선물이었다면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그런 마법이라도.... "
나는 부정했다.
"아뇨. 그런 기록은 어느 고문서에도 없었습니다. 푸른 장미는 상징일 뿐입니
다. 영원과 불멸의 신의 영역에 대한 암시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
백화는 내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그리 탐이 나는 장미는 아니군요. "
"요즘의 일부 학자들은 푸른 장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속임수였다는 것
이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전설로 기억할 뿐입니다. 이 나라에서 딱딱
한 고문서를 읽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깐요. "
백화는 흐릿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책을 많이 읽었나 봐요? "
나는 짐짓 시큰둥하게 말했다.
"책 속에는 여자와 재물이 있다는 소리에 혹해서 많이 읽었죠. "
백화의 미소가 웃음으로 변했다. 나는 여자아이를 웃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축
복 받을 일인가 하고 찬양하는 어느 시인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탄 같은 검정의 머리칼과 섬세하고 여린 이목구비의 어린 듯한 얼굴. 반팔
블라우스 하얀 팔뚝 미묘한 손가락. 약간 솟아오른 가슴과 좁은 허리 긴 무명치
마가 감싼 날씬한 다리 등 이 모두가 웃음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백화와 나는 2층 홀을 가로질러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통 없었다. 찻잔이라도
하나 있으면 툭 떨어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되돌아 나가려는 순간, 백화가 나
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저쪽에서 기침소리가 들린 것 같아요. "
그 방은 살짝 문이 열려져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맡아졌다. 오래 묵은 양피지
와 종이의 냄새다. 방에는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 서류를 가득 쌓아놓고 직인
을 찍어 대고 있었다. 청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국의 관료임에
틀림없었다.
"잠깐, 문의할 사항이 있는데요. "
내가 말을 던지자 늙은 관료는 매우 느린 속도로 턱을 들어 올렸다. 이빨이 대
부분 빠졌는지 볼이 홀쭉했고 눈은 주름살과 허연 눈썹에 파묻혀 있었다.
"상속신고를 하려는 데 어디로 가야 담당자를 만날 수 있죠? "
늙은 관료는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옛? "
늙은 관료는 다시 중얼거렸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근무 시간이 끝났다는 건가? "
그런데 내 옆의 백화가 늙은 관료에게 다가가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일드 공작가예요. 붉은 드래곤과 푸른 장미가 문장에 그려져 있는. "
늙은 관료는 책상에 두 손을 짚으며 허리를 후들거리며 일어섰다. 책상 한켠의
양식철 뒤적거리더니 나에게 상속신고서 한 장을 내밀고 작성하라는 손짓을 했
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짚고 뒤켠으로 걸어가 두루마리 서류첩과 문서집이 빽빽
히 쌓여있는 책장들의 분류번호를 따지며 등기서류를 찾았다.
나는 상속신고서를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대충대충 기입을 했다. 하지만
사망증명인 두 명 혹은 주군의 확인서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막혔다. 나는 궁리
를 했다. 밖에 나가서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오려면 몇 푼이라도 쥐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관례대로라면 제국선포 이후 모든 귀족의 주군은 황제인데 하지만...
"뭐가 잘못됐나요? "
내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자 백화는 궁금한 듯 물어왔다. 나는 신고서
의 빈 부분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필요하군요. "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 명분은 내가 하면 되고 또 한사람만 구해오면 되겠네요. "
백화가 입술을 오물거리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번쩍하고 좋은 아이디어
를 얻었다. 나는 내 착상을 백화에게 전했다.
"네에? 나보고 당신의 주군이 되라고요? "
"그냥 서류에 이름만 적어 넣는 겁니다. 그러면 한사람만 있어도 충분하죠. 아
무런 의무도 책임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기사도와 서약제도 같은 것은 모두 로
맨스 소설에서나 나오는 유물이 되었으니깐요. "
백화는 말없이 눈만 깜박이며 망설였다.
"보일드가는 전례로 여성을 주군으로 모셨으니 어긋남도 없습니다. 어차피 관
료의 입맛에 맞게 양식만 맞추면 되니깐, 부탁드립니다. "
주저하던 백화는 계속된 내 간청에 결국 신고서에 사인을 하며 말했다.
"나중에 후회해도 나에게 탓을 돌리지 마세요. "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에게 나중은 없다는 사실을 이 아가씨는 알고 있
을까.
늙은 관료는 내가 돌려준 신고서를 토대로 또다른 서류를 작성했다. 서쪽 창으
로는 해거름의 저녁놀이 하늘과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늙은 관료가 무
어라고 중얼거렸다. 백화가 통역해 주었다.
"서임의식이 필요하데요. "
"서임의식요? "
늙은 관료가 중얼중얼거렸다.
"새롭게 작위를 받았으니 당연히 주군으로부터 인정의식을 치러야 한데요. 법
에 그렇게 나와 있데요. "
나는 투덜거렸다. 아직도 그런 인습 같은 행정법규를 따르고 있냐고 이의제기
를 했다. 늙은 관료는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였다. 백화가 통역해 주었다.
"행정민원구제나 심판을 받으려면 내일 아침에 와서 신청하래요. 담당자가 퇴
근했대요. "
나는 포기했다. 나는 순순히 의식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늙은 관료는 부들 얼
굴근육을 움직이고는 느릿느릿 걸어가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에는 은제칼이
칼집도 없이 세워져 있었다. 늙은 관료는 은제칼을 꺼내 백화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자주색 커버의 책을 펼쳐 들었다.
붉은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밀물처럼 밀려와 방안을 꽈악 채웠다. 내 두 손은
순간적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백화의 하얀 볼도 빨갛게 변했다. 방안의 모든 것
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백화는 붉은 기운을
십자로 반사시키는 은제칼을 수직으로 세웠다. 늙은 관료는 책을 읽었다. 하지
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백화도 통역해 주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대 이름은? " 백화가 엄숙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 이름은 에반 보일드. 붉은 드래곤과 푸른 장미
의 기사의 자손. "
늙은 관료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황혼의 짙음이 삼켜버
렸다. 백화는 말했다.
"그대의 명예는 어디에서 오는가? "
"내 꿈. 내 의지. 내 약속. "
"그대는 어둠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밝음으로 가겠는가? "
"어두운 세상에서 밝음. 밝은 세상에서 어두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여명과
일몰에서 그림자. "
"그대의 피는 누구를 위해 바치겠는가? "
나는 멈칫했다. 이런 문구는 기사도소설에 없던 것이다. 백화의 눈은 은제칼에
가려 있었다. 나는 답했다.
"내 심장에. 적의 심장에... 그리고 친구의 심장에. "
"그대의 주군은? "
"백화. 나의 주군... 나의 친구. "
백화는 은제칼을 내렸다. 드러난 눈에는 은은하게 붉은빛이 들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백화는 은제칼을 번갈아 내 양쪽 어깨에 갖다 대었다.
"에반 보일드. 붉은 드래곤과 푸른 장미의 기사. 그대는 이제부터 백화의 하나
뿐인 친구, 하나뿐인 약속이다. "
나는 감사의 예를 올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화는 은제칼을 늙은 관료에게
되돌려주었고 다 끝났다는 말을 들었다. 축포도 없이 박수도 없이 쓸쓸한 제의
는 이로써 끝났다. 방을 나서기 직전 백화는 늙은 관료에게 '미셀, 오랜만이었
어요'라고 작별인사를 고했다. 둘은 원래 아는 사이였던가 보았다. 늙은 관료는
손을 흔들었다.
백화의 발이 멈춘 곳은 메트로의 사립여학교의 기숙사였다. 여기는 상류귀족
의 영양과 부르주아 거부의 딸들이 대대로 다니는 곳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기
숙사의 정문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고 마차꾼들이 들고 있는 등불로
인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정문 안쪽에는 정성을 들여 매만진 머리를 한 아가씨
들이 야회복을 입고서 차례를 기다리고 기숙사의 마담 두 명이 입구 양옆에 서
서 아가씨들의 옷차림을 살펴보고는 아가씨의 손을 턱시도를 입은 에스코트할
남자에게 인도해 주고 있었다.
"어머, 백화야. 네도 무도회에 갈거니? "
한바탕 낄낄거림이 내 뒤로 들려왔다. 키드장갑을 끼고 사틴 장식의 핑크 드레
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선두로 일군의 마드모아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드레스도 없고 구두도 없구나. 너희 마녀 할머니는 뭐하고 있니? 호박
마차는 또 어디 있고? "
쟁반을 깨는 듯한 여자애들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었다. 선두의 여자애는 내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애는 굳이 혐오의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이 남자는 누구니? 혹시 10분전만 해도 서생원이었던 너의 마부니? "
나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놓았다. 아리따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입안에 가시
가 돋친 아가씨다. 머릿속에 '아래 것들'이라는 개념을 가진 족속들은 대개가
이런 유머를 즐긴다는 것을 알기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레이첼, 소개할게. 내 친구야. 이름은- "
"됐어. " 레이첼이라고 불린 핑크 드레스의 아가씨는 백화의 말을 가로막았다.
"흥, 왜 내가 네 친구의 이름을 알아야 하지? "
여왕을 모시는 시녀처럼 레이첼의 뒤를 감싸고 있던 일군의 마드모아젤들은 일
제히 조소의 눈빛을 내게 보내왔다. 감당하기 어렵다.
"레이첼양. 그것이 바로 숙녀의 에티켓이기 때문이지요. "
"교장선생님! "
레이첼과 마드모아젤들은 당황해하며 드레스자락을 잡고 갑자기 나타난 초로의
귀부인에게 예를 올렸다. 기품 있는 귀부인은 가볍게 반례를 하고는 백화에게
몸을 돌렸다.
"백화양. 그 공자분을 레이첼양에게 소개시켜주세요. "
"교장선생님! 저는 소개 받고 싶지 않아요! "
레이첼은 소리를 질었다. 귀부인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드모아젤. "
"그는... 그는 몰락귀족이에요. "
대단했다. 이마에 신분을 써 붙인 것도 아닌데 단번에 알아보더니. 과연 종자
가 틀리다.
"그 점이 소개받는 데에 문제가 되나요? "
"나는 천한 사람은 알고 싶지 않아요. "
레이첼은 툭 내뱉었다. 내가 그 말에 상처를 받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귀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레이첼. 내가 신분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신분은 사람은 많은 부분
을 설명해주죠. 하지만 전부를 설명해 줄 수는 없어요, 내가 보기에 이 공자분
은 천한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그는 레이첼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어요. "
"나는 그게 더 기분이 나빠요! " 레이첼은 불만의 목소리로 항의했다. 뒤의 마
드모아젤들도 덩달아 수군거렸다. 백화는 두 손을 포개고 가만히 있었다. 귀부
인은 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분에 합당한 교양과 덕을 갖춘 숙녀를 길러내는 것 본 학교의 교육지침이에
요. 요새 유행하는 사상을 알고 있죠? 사회진화주의자들은 신분제도의 혁파를
외치고 있어요. 귀족답지 않은 귀족이 많아질 때 이런 무리들이 득세를 하게 되
는 거예요. "
귀부인은 유연한 보수주의자였다. 낮은 계급에 대해 관용적으로 나오지만 신분
의 상승은 용납하지 않는다. 레이첼은 샐쭉거렸지만 결국 마지못해 받아들이겠
다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면서까지 서로 소개를 해야 하나 했지만 예의를 모른다는
소리를 귀부인에게 받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는 반쯤 미미하게 웃어보이고는 말
했다.
"레이첼, 내 친구 에반이야. 에반, 내 친구 레이첼. "
그것뿐이었다. 백화는 내가 내 아버지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을 눈치챈 것 같았다. 레이첼는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까닥 인사를 해 왔다.
얼룩 하나 없는 피부에 걸친 엷은 화장. 영롱한 빛을 발하는 귀걸이와 목걸이
속의 보석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귀티어린 얼굴 표정. 도도하고 아름다운
여자아이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언제나 꾸곤 했던 몽상에서 이상적으로 그려보
았던 여자아이다. 닿을 수도 없고 손댈 수도 없는 가시 돋친 차가운 독장미.
장미. 나는 내 품안에 있는 장미가 생각났다. 꽃파는 처녀에게 산 장미를 들고
다니기가 뭐해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망가져 버렸을까' 옷이 헐렁해서 괜찮
았을 듯 싶었다. 과연.
내가 장미를 품안에서 꺼내자 마드모아젤들의 입안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
도 이상했다. 원래는 약간 시든 기가 있었는데 지금의 장미는 인간의 마음을 매
료시키는 생기를 만개히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독한 장미향이란.
나는 레이첼이 이 장미를 뚫어지게 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지고 싶은 모양이
었다. 장미가 절벽에 피어 있지 않고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
다. 만일 이 아가씨가 저 천길절벽 위의 꽃을 꺾어 오라도 나는 기꺼이 올라갔
을 것이다.
"사죄하는 뜻에서 이 장미를 드리죠. "
나는 레이첼에게 장미를 내밀었다. 레이첼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다시 혐오의 표정이 떠올랐다.
"싫어- "
"레이첼. "
귀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입술이 비쭉 나온 레이첼은 내 손과
닿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장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누구 이 쓰레기통의 장미 가질 사람? "
뒤의 마드모아젤들은 조롱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서로를 앞으로 밀었다. 귀부인
은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가질게. 레이첼. "
백화가 손을 내밀었다. 레이첼이 뭐라고 상처주는 말을 말하려는 순간, 더 이
상의 분란을 막으려고 귀부인이 끼어들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오늘 장미 무도회에는 장미가 필요하니깐. 백화양은 장
미를 준비하지 않았죠? 백화양, 황태자께서 무도회 의상을 보내오셨어요. 무도
회에 꼭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요. 원하지 않더라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이도록 하세요. "
레이첼은 질시의 눈빛을 띠고는 휙 장미꽃을 집어 던졌다. 귀부인은 혀를 찼
다. 나는 황태자라는 단어에 놀랐다. 기숙사의 마담이 귀부인을 불렀고 마차들
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여섯의 남자들이 와서 마드모아젤들 곁에 섰고 말들의
투레질이 요란해졌다. 나는 백화를 보았다. 백화는 장미 줄기를 꼬옥 쥐고 있었
다. 가시에 찔려 피 줄기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백화가 기숙사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는 나는 무도회로 향하
는 마차들을 스치어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장미 무도회의 기원은 내 선조가 여
왕에게 푸른 장미를 바친 것이 기원이 되었다. 이 날은 왕가의 보물인 푸른 장
미를 뭇 귀족들에게 전시하여 위엄을 보이는 기념일이었다.
나는 르만강쪽으로 걸었다. 가로등은 어느 블럭부터 툭 끊기어 주변은 어두웠
다. 르만강의 다리밑은 거지와 행려병자들의 소굴로 유명했고 밤이되면 시체들
을 내다버리는 곳이다. 나는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다 보았다. 강물은 조용히
흘렀다. 죽으면 이 강물에 빠져 바다에 다다르고 싶었다.
"하루살이. 남은 시간은 잘 보냈나. 아까 보니 귀여운 여자아이랑 돌아다니고
있더군. "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맥머피였다.
"나쁘진 않았어요. 당신은요? "
"아, 나도 괜찮았어. 새로운 고객을 만났거든. "
"그거 다행이군요. "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의 틈이 벌어져 만월이 보였다. 스르릉. 칼
이 뽑혀져 나오는 음향이 들렸다.
"왜 여기로 왔지? 갈 곳이 많았을 텐데. "
나는 도리질을 하였다.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내게 술을 사준... "
맥머피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너를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나? "
나는 서서히 묻혀져 가는 강물의 달을 내려다보았다.
"아뇨. 그저 생각을 해 보았을 뿐이에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정보는 흘러야
가치가 생긴다고요. 그 기회를 놓칠 당신이 아니죠. "
맥머피는 웃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그러나저러나 너는 참 아깝군. 그
러나 어차피 너에게는 너의 운명이 없었어. "
나도 웃었다.
맥머피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뭔가 할 말은 없나? 고통 없이 죽여달라는 말 같은 것 말야. 단, 돈이 드는
부탁은 안돼. "
"이런, 그 꽃파는 처녀에게 빚진 금화 넉 양을 대신 갚아달라고 하려 했는데.
"
맥머피는 헛기침을 하며 웃다가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 검은 장미, 너는 오른손잡이인가, 왼손잡이인가? "
"검은 장미? "
"업계에서 쓰는 자네에 대한 암호명이야. 자네 아버지는 블루 로즈. 너는 검은
장미. "
지겨워졌다. 이 놈의 장미.
"쳇. 내 아버지의 이름이 다크인 데 왜 내가 검은 장미여야 하지. "
등에 화끈한 느낌이 지나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잠시 후 아픔이 치솟
아 올랐다.
"오른손잡이인가, 왼손잡이인가? "
맥머피는 다시 물었다.
등을 만진 내 손에는 핏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왜? "
맥머피의 칼이 이번에는 옆구리를 스쳤다.
"윽! "
"오른손잡이인가, 왼손잡이인가? "
맥머피는 살만 베고 있었다. 내장과 뼈는 상하지 않게. 희롱하다 죽일 속셈인
가.
"오른손잡이다. "
"고맙군. "
맥버피는 칼이 횡으로 종으로 움직였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맥머피는 내 오른
쪽 어깨와 팔을 난자했다. 그리고 칼을 대충 닦고는 칼집에 넣었다. 다리 건너
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뛰는 압박에 나는 머리가 멍멍
해져갔다. 피곤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팔에다가 누군가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염소 수염을 기
른 중년의 남자였다.
"고맙습니다. "
나는 감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염소 수염의 중년의 남자는 무뚝뚝하게 외면했
다.
"대충 해. 쟈쿠, 시간이 없어. "
내 앞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가죽 장화에 비단 화복을 입은 고급창녀
의 기둥서방 풍의 젊은이였다. 오른쪽 귀볼에는 보석이 반짝이는 귀걸이가 매달
려 있었고 양 손에는 짙은 색의 장갑을 끼고 있었다. 쟈쿠라는 남자는 붕대를
매듭짓고는 이어 수건으로 내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나는 몸을 꿈틀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냥... "
퍽. 쟈쿠는 왼손 손등로 내 귓가를 때렸다. 그 가격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피가 뭉컬 입안에 배어들었다.
"이런 쟈쿠, 죽일 때는 네가 알아서 해도 되지만 제발 남을 때릴 때는 나하고
상의해서 때리란 말야. "
양손 장갑의 젊은이는 신경질적으로 수건 하나를 내 던졌다. 쟈쿠는 그 수건을
집어들어 내 입안에다가 쑤셔 넣었다. 나는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됐어. 이제 옷을 입혀. "
쟈쿠는 한켠에서 유치찬란한 꽃무늬 프린트 상의를 집어들었다.
"설마 그 옷을 나한테 입힐 생각입니까? 꿀벌이랑 나비랑 모여들면 어떻게 하
죠? " 하고 농담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꽉 막혀 있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붕대에 피가 스며드는 고통 끝에 옷을 다 입히고는 쟈쿠는 내
머리채를 잡아 나를 일으켰다.
"됐어. 이쁜데. "
기둥서방 풍의 젊은이는 손뼉을 쳤다. 쟈쿠는 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수건을
빼고는 다리 밑으로 던졌다. 그리고 내 턱밑을 죄어 입을 벌리고는 환약 두 개
를 집어삼키게 했다. 환약은 금방 녹아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자, 가자. 도련님이 화내시겠다. "
젊은이는 휘파람을 불었고 저 편에서 마차가 달려왔다.
마차 안에서 나는 내가 먹은 환약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카미의 선물이
었다. 천렵 지방에서 비밀리에 제조되는 환각제였다. 내 몸의 통증은 어느틈엔
가 사라지고 정신은 바람계곡의 메아리처럼 흔들거렸다. 이 약은 평생 곡갱이만
들고 살았던 농부들을 화살받이로 전장터로 내몰 때 천렵 지방의 영주들이 썼
다.
내 오른 어깨에는 붉게 물든 꽃이 피여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카미
의 선물을 먹은 뒤에는 약효가 풀릴 때까지 피를 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린다.
앞에 앉은 쟈쿠는 내 눈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빨간 장갑을 낀 젊은이는
창밖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국경지방으로 부역을 나간 애인을 그리
워하며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할 운명의 여자의 심정을 담은 노래다. 30년 전에
유행하던 낡은 노래이다.
"가사가 틀렸어. "
젊은이는 노래를 뚝 그쳤다.
"뭐? "
"바람은 바다를 타고 건너오고 강물은 하늘을 삼키는 데가 정확한 가사야. "
젊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미소다. 저런 미소는 담장 위로 얼굴을 내
민 조신한 처녀에게나 써야하는 미소다.
"내 성명은 야맹이야. "
"응. "
"다음부터는 남이 노래부르는데 트집잡지마. 칼침 맞고 싶지 않으면. "
"응. 그럴께. "
야맹은 입을 둥글게 말고는 후 불었다. 무언가가 내 목 옆을 지나 벽에 박혔
다.
"죽고 싶어? "
나는 웃었다.
"어차피 죽을 거잖아? "
"하긴. "
쟈쿠가 내 눈에서 시선을 떼고 야맹을 바라다보았다. 야맹은 말했다.
"신경쓸 필요 없 어. 카미의 선물을 받고 간이 단단해진 거니깐. "
마차는 판테온 광장에서 멈추었다. 이곳은 정동의 개선 기념문을 통과하여 반
원 계단식의 구성으로 갖가지 신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제국의 확장
과 더불어 각지의 신들이 수도로 옮겨져 모셔진 것이다.
쟈쿠는 나를 마차에서 끌어 내렸다. 아덴트 지방에서 숭상되어온 정의의 여신
인 이스의 동상 아래에는 일군의 무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광장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횃불쪽으로 다가서자 웅성거림이 커졌다.
야맹이 외쳤다.
"보일드 공작가의 계승자, 에반 보일드님께서 도착하셨소. 상대인 타일러 백
자가의 넷째 공자이신 가젤님은 오셨습니까? "
"물론이오. 이미 반식경이나 기다리고 있었소. "
"나는 보일드 공작가의 친구인 참관인 산지의 야맹이오. 그리고 이쪽은 역시
보일드 공작가와 인연이 깊은 아스카의 쟈쿠이오. "
코에다가 안경을 걸치고 랜턴을 든 인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이의가 없소. 본래 타일러 백작가의 결투에는 참관인으로 꼭 타일러
백작가의 혈연인이 나와야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따로 귀한 분을 모시게 되
었소. 시안의 명문, 막시밀리안가의 영애이신 엘레나 양이십니다. "
"오, 그렇소? 이해하겠소. "
나는 검은 하늘에다 대고 한바탕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세상이 즐
거워졌다. 카미의 선물 덕택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타일러 백작가는 에스테이트 후작 가문과 더불어 세레미아의 양대 문벌이다.
타일러 백작가는 대대로 영지를 경영하고 전쟁에 참여해 오면서 그 세를 넓혀간
전형적인 토지 귀족이자 군사귀족이었고 에스테이트가는 황제의 측근에 머물면
서 황제권에 기대어 권력을 쌓아올린 신흥 귀족이었다.
그래서 타일러가는 항상 황제권의 확대에 반대하는 제후 세력의 주축이 되어
왔다. 황제가 벌이는 제후 자치권 침탈에 대해 방어의 논리를 펴면서 제국의 발
전 속도를 늦춰 느슨한 연방국가에 머물게 하고자 했다. 한 때, 전대 황제 였던
니콜라이 대제의 중앙집권 강화책에 자유도시들이 급속도록 황제로 경도하고 황
제 직속의 상비군이 확충되는 흐름 속에서 반역의 수괴로 몰려 숙청당할 위기에
처할 뻔도 했었다. 하지만 전대 황제의 느닷없는 서거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팔황자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황실 상잔의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며
황제에게 멸문을 당하거나 영지를 빼앗겼던 영주나 제후의 후손을 찾아 그 영지
를 다시 되돌려 주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세레미아 제국은 백년전과 다름
없는 봉건제 시스템으로 반해체되어 버렸다.
"결투는 기사의 의무이자 명예요. 따라서 결투는 결투로 끝나고 모든 것을 종
결 지을 것이오. 더 이상의 구차한 복수는 없을 것이오. "
"동의하겠소. "
야맹과 공증인이나 쓰는 안경을 걸친 인물은 계속 주절거렸고 쟈쿠는 내 등뒤
에 서서 내 옷을 말아 쥐고 섰다. 나는 이스의 저울대 아래에 있는 가마를 노려
보았다. 둥근 원이 계속 말아진 달팽이 미로의 문양. 막시밀리안가의 상징이다.
가마의 주위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시녀 복장을 한 여인네들이 시립하여 서
있었다.
"그만! 귀한 손님을 모시고 있는데 이게 무슨 결례냐? "
앞을 가린 시종의 어깨를 밀치며 꿩귓털 모자에 레이스 셔츠를 입은 청년이 갑
자기 나와 소리쳤다. 한 눈에 부잣집 자제임을 알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만한 입술. 교만한 눈매. 교만한 코.
"가젤님. 하지만 법에는... "
"시끄럽다. 이러다가 밤을 새우고 아침을 먹어야 결투를 하겠다. 미칠, 내가
너를 고용한 까닭이 뭐냐? 그 귀찮은 법 좀 어떻게 하라고 한 것 아니냐? "
미칠은 난처한 기색으로 야맹을 돌아보았다. 야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후에 이의를 달지 알겠소. "
나는 고개를 가슴에 박고 킥킥킥 웃었다. 이건 카미의 선물 때문이 아니다.
"공자님. 이 분이 그 유명한 다크 보일드 님의 아드님이신가요? "
이쁜 여자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었다.
녹색 시녀복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하지만 몸도 날씬하고......
예쁜 여자임에 틀림없다.
"맞아. 그 유명한 색마의 아들이지. 가까이 가지 말라고. 위험한 녀석이야. "
"정말요? 순진하게 생겼는데요? "
시녀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몸을 흔들어 쟈쿠의 손에서 풀려 나고자 했
다. 쟈쿠는 더 힘을 가했다. 가젤은 시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아 서려 했다. 시
녀는 살짝 몸을 돌려 가젤을 피했다. 그리고 어느틈엔가 내 앞에 섰다. 이상한
몸놀림이다.
"당신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은데요? "
시녀는 친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쟈쿠는 손을 풀어놨다. 나는 말했다.
"아니. "
"어머, 왠 거짓말. 울긋불긋 꽃무늬 옷을 입는다고 가려지나요? 피냄새가 나는
데. "
가젤은 크게 당황했다. "이, 이, 이봐, 애린양. "
"호호, 괜찮아요. 공자님" 애린은 교소지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다 우리 아가씨 마음에 들고자 공자님께서 꾸미신 일이라는 거 저는 진작
부터 눈치채고 있었어요. 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거든요. "
가젤은 사정했다. "애린, 제발, 아가씨한테만은. "
"저는 대륙 제일의 정치가문 막시밀리안가에서 오랫동안 지냈답니다. "
대륙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인 사건과 음모의 배후에는 막시밀리안라는 이
름이 있다. 대륙의 우편배달제도를 독점하는 가문에서 출발하여 대륙을 잇는 금
융거래망을 장악하면서 그 가세를 키웠다. 대륙의 주요 왕조와 결혼을 통해서
인척관계를 맺고 분쟁 지역의 중재 임무역을 몇백년동안 맡아오면서 그 바탕이
한층 굳건해졌다. 본가에서 분가한 많은 일족들이 각 왕국과 제국에 진출하여
재상과 국무대신직을 역임하는 등 상위귀족이 되었고 본가와 네트워크를 형성하
였다.
하지만 세레미아에서만큼은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세레미아 제국은 일관되게
막시밀리안가와 싸워왔다. 전설에서는 그 시초를 시간의 교, 혹은 지금은 마교
라고 부르는 말법종교가 발연히 불붙었던 에머랄드 여왕 때로 잡는다. 당시 시
간의 교의 중심지는 세레미아였다. 그래서 대륙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몰려 들었
고 막시밀리안가는 이 순례자들을 운송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에머랄드 여왕은 시간의 교를 못마땅히 여겼고 결국 마교로 규정하고 신앙을
금지시켰다. 이에 시간의 교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막시밀리안가는 교도들에게
외부물자를 제공하였다. 에머랄드 여왕은 마교의 무리를 돕는 막시밀리안가의
일원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고 그가 아끼는 기사에게 명해 세레미아에 남아 있는
막시밀리안가의 사업망을 분쇄하도록 하였다. 그 기사가 바로 내 조상인 푸른
장미의 기사이다.
"알겠어. 내 애린에게 신세를 졌어. 언제가 갚을 날이 있을 거야. "
애린은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어요. 기대되는걸요.
그런데 이 남자분, 너무 쉽게 죽이지는 마세요. 저희 아가씨는 만사에 의심을
하는 분이랍니다. 역시 막시밀리안가의 딸이니시깐요. "
나는 이 여자애의 면사 뒤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나는 말했다.
"잠깐. "
저만치 걸어가던 애린은 나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왜요? "
"내 이름은 에반 보일드야. "
"어머, 왠 멋있는 척. "
"막시밀리안가의 세레미아 진출을 대대로 막아왔던 보일드가의 마지막 후손이
야. "
애린은 꺄르르거렸다. 쟈쿠가 내 등 뒤에 날카로운 것을 대었다. 가젤은 기가
차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몰락귀족 녀석들이란... "
"가주의 딸에게 꼭 전해줘. 내 죽음을 꼭 확인하라고. 그래야만 훗날 베개를
높이고 잠을 잘 수 있을거야. "
가젤은 내 뺨에 장갑을 벗어 던졌다. "이 건방진 녀석, 빨리 검을 들어라. 미
칠, 검을 가져와. "
미칠은 허둥지둥 시종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 레이피어 두 개를 방석에 받쳐 가
져왔다.
나는 검을 집어들었다. 왼손이었다. 영 어색했다. 교련 시간에 형식적으로 대
검술을 배운 적이 있기는 있다. 기억나는 교련선생의 말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
와는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잽싸게 도망가는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써 검은,
특히 결투에서 흔히 쓰이는 레이피어는 적당한 무기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싸우고 싶다는 마음이 뭉클 솟아나고 있었다. 이것은 내 이
성과 논리를 거부하는 몸의 기세였다. 가젤은 슬쩍 내 앞가슴을 찔러왔다. 나는
황급히 검을 내려쳤으나 막지 못했다. 지이익. 내 옷자락이 찟겨졌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검을 들어 마구 휘둘렀다. 가젤은 경쾌한 발놀림으로 내 검끝을 모조리
피했다. 그리고 내게 비웃음을 날렸다. 평소의 나라면 이쯤에서 칼을 내던지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고 포기해 버릴 것이다. 이들이 나에게 카미의 선
물을 먹인 까닭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가젤은 발을 들어 나를 걷어찼고 나는 뒤로 넘어졌다. 나는 옆으로 해서 땅바
닥을 굴렀다. 제 딴에는 가젤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염두에서 피하려는 목적으
로 구른 것이었지만 가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구경하는 가젤의 시종
들에게서 왁자지껄한 조롱과 조소가 터져 나왔다.
가젤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천천히 옷자락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 때 가젤은 기습적으로 검을 찔러왔다. 나는 급히 내 오른팔을 내
밀었다. 피부가 벌어지는 느낌이 지나갔다. 가젤은 공중에 칼을 들어 피를 털어
냈다.
내 오른팔은 오래 전부터 작동불능이었다. 붕대에 감싸진 상처는 이미 터져서
가젤의 칼끝이 닿기 전부터 피를 흐르고 있었다. 나는 검을 콱 쥐고는 가젤에게
돌진했다. 나는 오로지 가젤의 얼굴을 노렸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인생의 목표로 살고 있는 메트로의 남자애들은 자신의 얼굴을 아끼는 법이다.
하지만 가젤은 그의 얼굴을 향하는 내 검을 간단히 내려 막고는 내 심장을 노
려 찔렀다. 나는 내 심장을 포기했다. 나는 가젤의 뺨을 향해 검을 그었다. 도
박이었다. 죽더라도 그의 얼굴에 내 이름을 기억시키고 싶었다.
과연 가젤은 놀라 황급히 검을 거둬들이고는 내 검끝을 가드로 빗겨가게 했다.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에 거친 숨결을 내뿜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
러섰고 뾰족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에 걸렸다. 그는 휘청했다. 그건 기회였다.
나는 팔을 길게 뻗었다. 하지만 가빠진 호흡에 내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고 더
구나 왼손이었다. 흔들거리는 내 검끝은 가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의 경
동맥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이 천한 놈이! "
내 옆구리에 격한 찢어짐이 느껴졌다. 가젤의 검끝이 꿰뚫고 있었다. 가젤은
내 가슴을 발로 차며 칼을 빼냈다. 나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가젤은 계속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는 발발 기며 그의 발차기를 피했다.
나는 막시밀리안의 딸의 가마까지 굴러갔다. 시녀들은 일제히 파란 천을 소매
안에서 펼쳐 내가 가마에 닿지 않도록 했다. 막시밀리안의 딸에 대한 무례를 걱
정한 가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앉고 멈추어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나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는 헉헉거렸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언가
가 내 가슴 한가운데를 탁 막고 있었다.
그 때 은은한 잠력이 내 등을 쳤다. 나는 울컥 검은 피덩어리를 토했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격렬하면서도 싸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카미의 선
물의 약발이 다한 것이다. 나는 검을 쥐고는 가젤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채 검을 뻗어보기도 전에 가젤의 검끝이 내 허벅지를 찔렀다. 나는 비틀
비틀거리다 승리의 여신의 동상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
는 가젤을 노려보았다. 나는 막시밀리안가의 여인네들을 보았다. 나는 야맹을
보았다. 쟈쿠를 보았다. 가젤의 시종들을 보았다. 구경꾼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둠의 한 켠에 서 있는 죽음의 사신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카미의 선물의 잔재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나
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다시 강한 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
스멀 피어올랐다. 내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내 관의 크기를 재고 있는 저 들
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4년 전 기숙학교가 있는 칼라스 지방에 늑대떼가 출현했다. 전신에 은빛 털이
돋은 늑대를 우두머리로 한 회색 늑대떼였다. 산간의 화전촌들을 차례차례 급습
하더니 드디어 도시와 도시를 잇는 제국대로 근처까지 내려왔다.
그 무렵 기숙학교는 퇴학생에 의해 방화를 당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재단
이사장은 비어 있는 고성을 물색했고 건물을 다시 짓는 기금을 모으는 동안 빌
려 쓰게 있었다.
왼손잡이 검객집안으로 유명했던 힐스베르그가의 근거지였던 이 성은 협곡을
등지고 해자와 단단한 성벽을 갖추었고 지하실에는 식량과 물을 가득 담을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 같았으면 늑대떼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
다.
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남쪽 지방에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모든 교역
망이 끊긴 상황이었고 당연히 식료품보급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교장은 휴교
를 선포하고 학생들을 산개시킬 생각이었는지라 훈제 육류 등은 오히려 중산간
의 별장으로 옮겨놨다. 반수의 선생들은 이미 휴가를 얻고서 떠나간 뒤였다.
그리고 늑대떼들이 남보다 앞서 집으로 돌아가던 일부의 학생들을 습격했다.
강물에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한 명이 이 소식을 기숙학교에 전했다.
처음에는 늑대떼들이 잠깐 머물다 스쳐 지나갈 거로 편하게 믿었다. 그러나 아
니었다.
늑대 한 마리가 성 앞 낮은 언덕에 배를 깔고 엎드리고는 이쪽을 노려보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늑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이 구사일생한 체른 태
생의 학생을 불러다가 물었다.
"늑대들의 수가 얼마나 되지? "
"글쎄요. 내 앞에는 한 예닐곱 마리 정도만... "
교장 선생은 학생들을 대식당에 모아놓고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집단적으로 움직이면 늑대들도 겁이 나서 덤비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젊은 시절에 늑대 사냥을 한 경험을 떠벌였다. 늑대들이 총 여섯마리 임을 강조
했다. 팔뚝에 난 상처도 보여주었다.
준비가 부산했다. 성의 무기고에서 녹슬어 가던 칼을 꺼내 갈고 창을 다듬었
다. 가죽 갑옷의 터진 부분도 수선하였다. 각목에 천을 감고 기름을 듬뿍 먹였
다. 근육에 자신없는 애들은 나발과 징을 집어들었다. 정오가 되자 학생들은 육
열 종대로 성문앞 마당에 모여들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들었다.
"약자(弱者)야, 딴에는 열심히 준비했구나. "
누가 내 뒤통수를 쳤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강자(强者) 선배였다.
"내 방패 좀 들어라. 너무 무거워 근육이 피로하다. 피로는 만병의 근원이라지
아마? "
나는 내 턱 밑에 이르는 크기의 방패를 받아들었다. 갑자기 강자 선배는 내 팔
뚝의 세 배에 이르는 팔뚝으로 방패를 쑥 밀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나
동그라졌다.
"이런, 이런. 이렇게 부실한 하체로 어떻게 여자를 만족시키겠냐? 좋다. 자 특
훈이다. "
나는 보마 자세를 취하고 방패를 고정시켰고 강자 선배는 인정사정 없이 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겼다. 나는 몇 번이나 나동그라졌다. 약자를 괴롭히는 게 인
생의 취미인 강자의 아류들이 몇 번의 발길질에 피곤해진 강자 선배를 대신하여
나를 쳤다. 셔츠가 땀으로 젖어들었다.
이윽고 교장선생이 나타났다.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마굿간의
문이 열리고 마차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성문 앞에 섰다.
"쳇. 교장이 우리처럼 걸어서 도시로 갈 것이라고 믿었어? 순진하긴. "
강자 선배는 내 어깨를 지팡이 삼았다.
"약자야. 너는 내 근처를 떠나서는 안된다. 강자 없는 약자는 밥이야. 하얀 쌀
밥. "
학생들이 더 동요하기 전에 교장은 성문은 열게 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는 여러 선생들과 교장의 세간 식솔들이 타고 있었다. 학
생들은 어수선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선두에 선 모범반장들이 걷기 시작하자 흐
름에 맞추어 따라나섰다.
"교장은 말야, 우리를 미끼로 삼은 거야. 늑대가 우리 살을 맛있게 잡수시는
동안에 자신은 잽싸게 팽이치는 거지. 그런데 내 근육은 너무 질겨서 늑대들도
싫어할거야. 그렇다면 나는 사는 거지. "
강자 선배는 시종 부근의 애들을 겁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도개교를 지나
꺾어질 때 네 필의 말을 살펴보았다. 얄숙이가 끼여 있었다. 얄숙이는 화려한
상류 사회를 동경하는 교장 부인이 승마용으로 구입한 말이다. 1년에 두세번 정
도 타면서도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해서 말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말들을 운동시키면서 몰래 함께 들판으로 끌고 나가 신나게 달리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경험으로 미루어 얄숙이는 민감한 겁장이였다. 만일 옆
에서 늑대들이 따라 달리면서 으르릉 거리면 참지 못하고 소동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저기 은빛 늑대다! "
길의 동쪽 언덕에 늑대가 모습을 들어냈다가 사라졌다.
"저기도! "
이번에는 서쪽 언덕에 세 마리의 늑대가 우리들을 굽이 내려다 보았다.
"뒤쪽에도! "
대열에서 뒤쳐져서 걷던 학생들이 흥분해 소리쳤다. 그 바람에 놀란 몇몇 학생
들이 앞사람과 부딪혀 대열이 엉클러졌다.
"징을 쳐라. 병장기를 높이 들고 야단법석을 떨어. "
교장이 마차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모범반장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나
팔 소리가 요란해졌다. 나는 방패를 흔들려다가 강자 선배의 제지를 받았다.
"미리 힘 빼지마. "
늑대 한 마리가 언덕을 내려와 마차 쪽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마차 위에 있던
육예(六禮) 선생이 화살을 시위에 매기고 쐈다. 화살을 늑대 허리를 스쳐 땅에
박혔고 늑대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학생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마차는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앞에는 긴 오르막 길이 있었다. 단숨에 그
오르막길을 통과하려면 미리부터 속도를 올려야 했다. 학생들이 바삐 뛰면서 마
차의 속도를 따라잡느라고 대열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방패를
내던지고 싶었다.
"으아악! "
길가 풀섶에 숨어 있던 늑대가 뒤편 학생 한 명을 덮쳤다. 목의 대동맥을 깨물
고 재빨리 물러섰다. 강자 선배가 소리쳤다.
"밀집 대형을 유지해. 마차를 따라 잡을려고 하지마. "
그러나 마차는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거운 징을
들고 있던 학생들은 징을 버렸다. 둔중한 칼도 버렸다. 그리고 마차를 따라잡으
려고 기를 쓰고 달렸다.
육예 선생의 등쪽인 우편에서 늑대들이 일제히 나타났다. 그리고 산개해 달리
고 있던 모범반장쪽의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육예반장은 비포장도로
를 달리는 마차의 난폭함 때문에 활을 쏠 수가 없었다. 늑대는 학생들의 목을
깨물면 바로 물러섰다.
나는 방패를 수직으로 세우고 멈추어 섰다. 강자 선배는 공포에 질린 주변의
학생들을 다스려 고대사 시간에 배운 장방진을 구축하도록 했다. 방패가 맨 앞
에 서고 그 다음에는 창과 곤류의 장형 무기가 섰다.
저 편에서는 은빛 늑대가 홀로 서서 우리들을 굽여 보았다. 그의 부하들은 허
둥대는 선두의 학생들을 차례로 살육하고 있었다. 간신히 도망친 학생들은 장방
진의 가로 와서 양 날개가 되었다.
마차는 오르막길을 거세게 오르고 있었다. 늑대 두 마리가 짖어대며 마차 옆을
따라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거리더니 길을 벗어나 언덕가의
관목숲에 처박혔다. 그 바람에 늑대 한 마리가 마차 바퀴에 찍혔다.
은빛 늑대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도 이 뜻밖의 사태
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의 상황 판단이 늦어지는 틈을 타서 늑대 세 마리가
장방진 쪽으로 날래며 들어왔다.
탕.
매캐한 화약냄새가 진동했다. 옆구리가 터진 늑대는 고통에 차서 울부짖었다.
모든 늑대는 행동을 멈추었다. 강자 선배는 머스킷총을 NO.3에게 건네주고 다른
총을 받아 들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기도는 끝났는가? "
가젤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힘들여 으쓱했다.
"이거 어쩌지. 승리의 여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걸. "
나는 검끝을 가젤을 향해 쳐들었다. 가젤의 한쪽 뺨이 일그러졌다.
"네 놈의 가벼운 입술을 찢어주마. "
화가 난 가젤은 거센 팔뚝힘으로 밀어 붙였다. 그 기세에 나는 검을 놓쳤다.
내 검은 하늘 높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올라갔다. 나는 그 검을 바라보았다. 아
름다웠다. 가젤은 검자루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이어 몸을 빼며 내 심장에다가
검끝을 박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매끄럽지가 못했다. 약간의 멈칫거림이 있었다. 그 틈에 나는 무감각해
진 오른팔을 감싸고 어깨를 앞세워 가젤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가젤은 검 대신
에 발로 나를 걷어찼다. 나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나는 땅바닥에서 굴렀다. 허겁지겁 내 검이 박혀 있는 곳으로 네 발로 뛰었다.
이번에는 가젤이 쫓아왔다.
조물주의 군상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엘프들의 동상, 땅달막하지만
강인한 드워프들의 동상, 추악스런 이빨의 오크들의 동상, 간사교활한 인간들의
동상. 내 검은 무릎 꿇은 엔젤의 두 손에 받쳐져 있었다. 원래 이 군상들은 거
대한 사막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발견된 고대의 유적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런데 계속되는 모래 침식을 피하여 문화 황제라고 칭송받았던 프레이저 황제 때
에 메트로로 옮겨졌다..
나는 계단을 기어올랐다. 내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나온 피가 점점이 떨구어 졌
다. 나는 다시 검을 왼손에 쥐었다. 내 뒤로 커다란 날개를 펼친 더블 드래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가젤은 호흡을 가다듬고 나를 향해 검을 폈다. 나는 그 검을 피하여 인간들의
군상 속으로 들어갔다. 조물주의 군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다. 갓난아이의 탄생과 부모의 웃음. 스승을 만나 축복의 세례를
받는 성장. 아름다운 여인의 관능어린 육체와의 만남. 병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자의 얼굴. 무덤에 해골로 남아있는 죽음의 끝 사이사이에서 나는 가젤의 검을
피했다.
늑대들은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저 쪽 마차쪽에는 도와달라는 고함소리가 메아
리쳐 들려왔다. 학생들은 독기를 품고 마차를 노려 보았다. 은빛 늑대는 흘낏
고개를 마차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쪽으로 무리를 모으는 울음소리를 냈
다.
늑대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강자 선배는 장방진을 유지한 채로 성으로 후퇴한
다는 명령을 내렸다. 모범반장이 서너 살아 있었지만 리더는 자연스럽게 강자
선배가 되었다.
앞길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 꿈틀거리는 학생도 보였지만 우리는 냉정히 외
면했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자를 치료한 약도 의술도 우린 없었다.
그리고 저들을 먹이로 삼고서 그만 늑대들이 저 멀리 가버렸음 하는 생각도 마
음 한 구석에는 품고 있었다.
우리는 무사히 성으로 귀환했다. 성에 남아 있던 절음발이 제크와 울보 엘리아
가 성문을 열어주었다. 질린 모습을 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사지로의 행진에서
열외됐던 저학년생들이 맞아주었다.
멀건 국물로 한끼를 대신한 저녁시간에 화제는 단연 강자 선배의 머스킷총이었
다. 그 총의 출처는 알만 했다. 2년 전쯤 국경으로 가는 군수품 보급부대가 며
칠 째 내리는 비를 피해 기숙학교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훔친 것임에 분
명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관리상태였다. 강자 선배는 2년동안 세심하
게 총기를 닦고 기름칠할 인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강자 선배는 내게로 왔다. 교장 선생의 사무실에서 훔친
것임에 틀림없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약자야. 네 마굿간에 갔다 왔다지? "
나는 바닥에다가 도형을 그려놓고 기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소식 한 번 빠르네요. "
"다 알게됐냐? "
"아는 만큼 사람은 또 모르게 돼요. "
강자 선배는 내게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숨을 참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오늘의 일을. "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약자는 빨리 잊을 수록 오래 살아남는다고 말한 사람
은 선배였죠. "
"나는 지금 프레맨의 현자에게 정중하게 조언을 구하는 거야. "
"듣기 거북하네요. "
강자 선배는 씨익 웃었다. 나는 말했다.
"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은 결사대를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가볍고 말을 잘 타는 자들을 뽑아 도시에다가 이 사태를 알리는 길이었지요. 성
공확률이 90%는 되겠죠. 하지만 여기에는 변수가 있습니다. 페스트에 대한 대비
로 도시가 혼란에 빠져있다면 군사를 여기에다가 파견할 수가 없게 되죠. 90% *
0% = 0%이죠. 교장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면서 남을 믿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만일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빠져나간다면 일단 자신은 무조건 살게 되는 거죠.
뒤에 0%를 곱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빠져나갈 성공확률은 한 32%로 떨
어집니다. 가족들이랑 값나가는 것도 챙겨야 되니깐요. 그래서 교장은 이 성공
확률을 높일 계획을 짭니다. 그리고 거의 성공할 뻔했죠. 선배가 말에게 독초를
먹이지 않았다면요. "
"너 죽고 나 죽는다. 너만 살 수는 없다, 동귀어진의 정신. 내 어깨를 딛고 살
려는 사람 다리 잡고 늘어지기, 물귀신 작전. 자자손손 내려온 우리 집의 가훈
이지. 그런데 이해 못 하는 게 있어. 왜 교장은 좀 더 성에서 버틸 생각을 하지
않았지? "
"교장 선생의 팔뚝의 상처는 진짜겠죠. 칼라스 지방의 향토지를 읽어보면 여기
는 과거 늑대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입니다. 늑대가 도시를 습격해서 도
시의 어린애의 반수가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죠. 은빛 늑대에 대한 전설도 있습
니다. 도시를 포위해서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우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습격했
다고 나옵니다. 급기야 도시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죠. 그러다가 여덟 황자의
난 때, 이곳이 헤게모니 장악 전투의 격전장이 되면서 엉뚱하게도 늑대들이 대
대적으로 소탕됩니다. 그래서 현재는 조용해졌지만 교장은 이곳 출신인 만큼 늑
대에 대한 공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
"호오. " 강자 선배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교장의 사정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푸줏간으로 가는 이번 행렬에 동참
했지? "
"동참한 것은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
"나는 교장 새끼가 늑대에게 살점이 먹히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
나는 바닥에 그려진 이등변 삼각형을 이용한 증명 정리를 발바닥으로 지웠다.
"살고 싶었으니깐요. "
"무슨 소리냐? "
"어차피 누군가가 도시로 가서 이 사태를 알려야 했죠. 하지만 교장이 자신이
마차를 타고 가겠다는 것을 말릴 사람은 없죠. 그렇다면 그 성공확률을 높이는
데 도와 야죠. 누군가가 희생되더라도 다수가 살 수만 있다면. "
강자 선배는 침을 탁 뱉었다.
"너도 다수의 신봉자냐? "
"그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지만 제법 차선은 되는 법이니깐요. "
"나는 윗대가리들이 못마땅해. "
"난국에 처했을 때 '정의'는 잠깐 잊는 법입니다. 선배가 말에다가 독초를 타
서 교장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징벌을 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장래 성안에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
홀 안에서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러 학생들의 재촉을 받은 엘리
아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 고향 언덕의 풀섶을
잊은 지 오래. 그리움? 내 그것도 잊은 지 오래. 아버지는 말했지. 병들고 지치
면 돌아오는 곳이 고향은 아니라고. 어머니는 말했지. 걱정 말라고. 걱정 말라
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꿈 속에 나타난 내 고향. 창 밖의 하늘은 지평선
에 구름이 흐르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왜 다수를 적용하지 않지? "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어쩌다 드른 우체국. 부모님에게 엽서 한 장을 쓰는데, 직원이 묻네, 내 고향
이름을 말하네. 그렇게 해서 받은, 10년이 쌓인 편지 꾸러미. 들뜬 마음에 열어
보니 모조리 백지 뿐이라네. 내 소꿉 여자친구는 글을 알지 못했지. 한 장 한장
백지를 꺼낼 때마다 선명해지는 여자친구의 얼굴. 고향 언덕의 풀섶. 그리움.
그리움.
"그렇다면 너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생각은 있고? "
"... "
한 밤중에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내 고향에서 편지가 왔네. 내 여자 친구
로부터 온 편지, 열고 보니 이번에는 백지가 아니었어. 모모와 결혼하니 결혼식
에 꼭 참석해 달라는 전갈. 나는 새벽빛이 맺히도록 편지를 썼네. 여자친구가
보내온 백지, 편지지 삼아 적었네. 내, 이제 간다고. 고향으로 간다고. 너를 신
부로 맞이하려고 내가 간다고. 붉은 하트 아래에 네 이름을 적어 놓고 내가 간
다고.
"선배는 저 노래 부르는 엘리아를 잡아 먹고 싶습니까? "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나는 노래를 끝낸 엘리아에게 박수를 보냈다. 여러 휘파람이 홀을 진동시켰다.
"약자야.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늘 낮에 우리는 전멸할 수도 있었다. "
빙그레 내 얼굴에 웃음이 새겨졌다. 나는 말했다.
"내가 괜히 괴롭힘이나 받으려고 선배 곁에 선 줄 알아요? 다 살려고 술책을
부린거죠. "
"나를 믿었다? "
나는 결론을 내렸다.
"선배의 리더십을 믿었죠. "
나는 피하기만 했다. 가젤은 여유롭게 나를 이리저리 몰았다. 밑에 있던 구경
꾼들과 시종들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가젤은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승리를 맛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발을 헛디뎌 뜻밖의 경사에서 죽 미끄러졌다.
긴 경사의 끝에 다다른 그곳에는 악마가 혀를 죽 내밀고 있었다. 그는 지옥의
심판자 사세르를 경배하고 있었다. 만신전인 이곳에서도 명부의 주인인 사세르
는 가려져 모셔지고 있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질질 끌면서 일어섰다.
가젤은 살벌한 풍경에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꼬챙이에 줄줄이 꿰여 지옥의
사자들에게 채찍질을 받고 있는 간음을 한 남녀들. 내장이 다 파이고 두 눈을
잃고서 고통을 호소하는 근친살해자. 커다란 뱀에게 통째로 삼켜지고 있는 진리
를 부정한 자.
나는 어깨숨을 쉬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먹고산다는 지옥의 괴물인 구아야
킬의 다리에 기대었다. 가젤이 무어라고 소리쳤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젤은 조심조심하며 내려왔다.
가젤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는 발 밑의 뭉특한 것에
걸려 푹 넘어졌다. 동아줄이었다. 나는 동아줄을 잡고 일어섰다. 그것은 아리수
손과 이어져 있었다. 아리수 여신.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뭇 군중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하계에 떨어진 구원의 여신.
원래는 신들의 향연에서, 잔치가 끝나면 남은 음식을 챙기고 그릇을 정리하는
허드렛 일을 돌보는 하급 신격이었으나 문득 발원하여 자신의 소망을 밝힌 이
후에는 인간들로부터 가장 많은 기도의 외침을 듣는 신이 되었다.
나는 아리수 여신에게 고귀한 동아줄을 내 피로 더럽힌 것을 사죄했다. 툭,
툭. 내 코잔등에 빗물이 내려 앉았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 마음과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자 선배는 빠른 결단을 내렸다. 마굿간에 남아 있던 늙은 암말인 헤수스를
죽였다. 어차피 독초를 먹여서 전력질주를 하면 심장에 무리가 가게 되어 있었
다. 질긴 말고기는 나누어 먹어서 기운을 차렸고 생피는 성문 앞과 마당에 골고
루 뿌렸다.
팔일 뒤 늑대들이 성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성문을 우리가 일부러 열어둔 것이
었고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힐스베르그 백작은 성을 침입한 적들과의 전투에서는 불패
의 필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물론 친족, 가신, 하인들까지도 모조
리 왼손잡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왼손의 성'은 그 건축구조와 시설물
이 오로지 왼손잡이 지향이었다. 그래서 오른잡이의 세상에 익숙한 적들은 이
별세계에 당황하고 한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성의 지붕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바퀴벌레도 잡아
먹었고 쥐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눈이 툭 불거져 두꺼비라는 별명의
민다니오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추락해 죽었다. 화분에 심어진 화초를 씹어먹
는 학생들도 있었다. 바보 테오틀은 습한 곳에 피어 있던 독버섯을 삼키고는 얼
굴이 시퍼렇게 되어서는 죽었다.
강자 선배는 시체들은 성의 마당에다가 가져다 놓았다. 시체들은 곧 썩어갔다.
우리들은 이왕 싸울 것이라면 우리가 유리한 곳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피냄새와
썩어가는 냄새에 늑대들이 동하기를 바랬다.
"비도 오는데 이제 그만 끝내야 겠어. "
가젤은 검신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크 엔젤
의 날개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툭, 툭. 빗방울은 한가롭게 내 얼굴을 때렸
다.
"빨리 성문을 닫아! "
"늑대들이 못 빠져나게 해! "
"선배, 은빛 늑대가 보이지 않아요! "
"뭐라고? 젠장, 안돼. 늦었어. 그냥 닫아! "
단 한 번 뿐이야.
뒤돌아보지마. 한 번 뿐이라니깐.
"아아악! "
"불을 붙여! "
"도망치지마, 등을 보이지마! "
늑대의 피와 사람의 피가 섞여 내 목덜미에 튀었다. 나는 방패로 들썩거리는
늑대를 찍었다.
핏물이 내 눈을 가렸다. 순간 눈을 감고 싶었다. 왜 내가 이 싸움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쓴물 같은 복수심이 내 마음 속에서 타올랐다.
밟으면 밟을 수록 그것은 다시 일어선다.
구름 높이로 치솟은 지붕의 저택을 소유하고 아름답고 자존심 센 여자를 아내
로 맞이한다. 나를 억누르려는 자들의 다리를 뎅강 잘라버리고 정원에는 저 남
쪽에서 가져온 기화요초를 심고 사슴을 풀어 놓는다. 높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쳐 작위를 사고 관직을 사고 마구마구 돈을 긁어 모은다. 대학에다가는 기부
금을 가져다 주고는 박사 학위도 따고 명예도 얻는다. 한발이 들어 빈민들이 굶
주리게 되면 양식을 풀어 존경을 얻는다. 사병들을 양성하고 취미삼아 산적들도
토벌하면서 군사적인 위치도 얻는다. 어릴 적 나를 때렸던 자들에 대한 원한도
갚아 그 마누라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딸은 첩으로 삼아 버린다. 저녁에는 매일
같이 파티를 열고 토요일이 되면 마누라에게는 매번 다른 보석과 구두와 드레스
를 신기고 입혀 오페라 하우스나 찾아 다닌다. 나이가 차면 두번째, 세번째 부
인을 얻고 무수한 아들과 딸들을 얻는다. 뜻이 맞는 통하는 자들과 친구가 되어
카르텔을 만들고 신디케이트를 형성한다. 매점매석을 하고 독점권을 얻어 무지
막지하게 돈을 번다. 그 돈을 바탕으로 땅을 넓히고 권력을 얻는다. 파당을 이
끌고 반대파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해 국가의 권위가 내 한 몸과 일치하게
된다.
나는 잘난 척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가젤을 노려 보았다. 도대체 이 녀석
과 나의 차이점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녀석이 될 수 있는 것은 나도 될 수
있고, 이 녀석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나도 가질 수 있다. 복수심은 지금까지 내
욕망을 억누르던 제어력을 걷어버렸다. 내 욕망은 내 심장에서 새로운 힘과 피
가 되어 내 왼손에 전달되었다.
화약이 폭발하는 파열음. 강자 선배는 늑대떼들의 두목을 찾고 있었다. 은빛
늑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늑대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또 다른 늑대가
두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놈만 죽이면 늑대들의 서슬은 꺾인다.
가젤은 연신 검끝을 내게 찔러댔다. 나는 주저앉고 엎어졌다. 나는 발악을 했
다.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가젤에게 던졌다. 울컥 토해 나오는 피덩이도 던졌
다. 그러면서도 내 왼손에 검만은 다시 꼭 쥐었다.
내 방패에 늑대 한 마리가 부딪혔다. 그 늑대는 장창에 찔려 버둥거렸다. 도끼
가 늑대의 머리를 잘랐다. 강자 선배는 두목으로 보이는 늑대를 발견했다. 그
늑대는 세 마리의 졸다구 늑대와 더불어 저학년생들이 숨어 있는 서쪽 방어탑을
오르는 계단을 공략하고 있었다. 머스킷총은 근접 사격만이 명중을 자신할 수
있다. 더구나 강자 선배는 사격의 경험도 일천하다. 4미터까지 접근해야 한다.
방패를 든 나와 장창을 든 NO.2와 NO.4, 그리고 손도끼와 또 한 자루의 머스킷
총을 짊어진 NO.3가 강자 선배와 한 조가 되어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가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칼의 동선이 좁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지하의 신인 사세르의 세계이다. 하늘의 신들이
숭상하는 방향인 오른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물이 구성되어 있다. 기둥과
벽은 왼편에 자리잡고 여백은 오른편에 있다. 지옥의 수호병인 야수의 머리를
한 도르족들의 창은 모두 왼손에 쥐어져 있고 그들은 왼편에 서서 도열하고 있
다. 나는 가젤이 이를 깨닫지 못하도록 일부러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다. 우드득, 우드득. 빗발이 거세져 갔다.
나는 늑대에게 어깨를 물어 뜯겼다. NO.2는 팔뚝을 물려 작동 불능이 되어버렸
다. 강자 선배는 늑대의 아가리에다가 총구를 박고는 발사했다. 늑대 가죽을 뚥
고서 내장이 부서져 나갔다. 한시름이 덜어졌다. 늑대들의 두목이 죽었으니 기
세는 수그러지겠지. 이제 성문을 열고 늑대들의 퇴로를 만들어 줄 차례다. 늑대
들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싸움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때였다. NO.4가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난 늑대에게 목을 물렸다. 은빛 늑대였
다. 성문도 닫혀 있었건만 어떻게 성안으로 들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NO.4는
발버둥쳤지만 은빛 늑대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방패를 휘둘렀다. 은빛 늑대는
훌쩍 피했다. NO.4의 대동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털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은빛 늑대는 강자 선배를 노려 보았다. 은빛
늑대의 한쪽 눈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애꾸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귀는 뜯겨져 나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당했다.
머스킷총을 장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강자 선배의 앞을 막았다. 은
빛 늑대는 내 키를 훌쩍 뛰어 넘었다. NO.3는 손목을 물렸고 머스킷총을 떨어뜨
렸다. 때문에 발사 장치가 부숴져 버렸다. 강자 선배는 은빛 늑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쐈다. 하지만 은빛 늑대는 잽싸게 몸을 틀었고 총알은 빗나갔다. 은빛
늑대는 강자 선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
야맹이 소리쳤다. 그가 상황을 파악해 버렸다. 가젤은 의문에 찬 표정을 하고
서 뒤돌아 보았다. 나는 야맹이 덧붙이기 전에 재빨리 외쳤다.
"걱정 말고, 막가의 딸에게 전해. 그녀에게 치근덕대는 녀석을 없애줄테니 나
와 차나 한 잔 하자고. "
"이 천놈이. " 내 자극에 콧구멍이 커진 가젤은 성난 황소처럼 나에게 덤볐다.
"도련님! 반대편으로 서 십시오 ! "
이미 늦었다. 야맹. 너의 도련님은 어떤 소리도 머릿속에 새겨지지 않는다구.
나는 뒷걸음질치며 스스로 코너로 몰려갔다.
파앙. 붉고 파란 불꽃과 함께 화약이 폭발했다. 하얀 연기에 이어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중에서 붕 떨어진 은빛 늑대는 바닥에서 발작하며
퍼덕였다. 강자 선배는 얼굴과 가슴이 시커멓게 된 채 두 손은 팔에서 끊겨져
있었다.
나는 뱃 속 깊이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바닥
에 떨어져 있던 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은빛 늑대에게 달려가 마구 찔렀다.
심장이 멈추고 살점이 헤어져라 마구 찔렀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신을 저주
하며 은빛 늑대를 짓이겼다.
창이 뚝 부러졌다. 창의 자루를 버린 나는 은빛 늑대를 밟기 시작했다. 내 목
구멍에서 뜻을 알 수 없는 광기어린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우리들은 이 산간 벽지에서 틀어 박혀 십대 시절을 보내야 하는가.
늑대의 밥이나 되려고? 왜 늑대들은 약하고 영영가도 없는 우리들만을 노리는
가. 저 도시에는 비계살이 충분한 작자들이 널려 있는데.
푹. 나는 가젤의 심장에다가 검끝을 박아 넣었다. 가젤의 두 눈은 크게 떠진
채 감겨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더욱 깊숙히 검신을 박아 넣었다. 부르르 떨림
이 검을 통해 내 몸에 전해졌다. 아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메아리가 되어 들
려왔다.
가젤은 내가 벽에 등을 지자 내 심장을 향해 최종의 일격을 가했었다. 나도 이
일초에 맞받아 검을 내밀었고 가젤의 검은 내 검에 빗겨 왼편으로 흘렀고 도르
족의 동상에 부딪혀 검신이 휘어졌다. 그 사이 나는 칼자루로 가젤의 옆구리를
치며 사각지대에서 빠져나갔다. 이에 가젤 역시 칼자루로 대항하며 한바퀴 돌았
는데 벽에 등을 지는 자세가 되었다. 더욱이 두 발이 평행이 되어 벽에 나란히
곧추서는 자세였다. 나는 검을 찔렀고 가젤은 내가 했던 것처럼 검을 쳐내려 했
다. 하지만 팔꿈치가 벽에 부딪혔다. 나는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힐스베르그의 성의 생활에서 왼손의 사용에 익숙하게 되었을 뿐이지 나는 왼손
잡이는 아니야.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야. 이렇게 나는 되내이며 검을 뽑
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젤의 교만한 더운 피는 보고싶지도 않았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세찬 빗발이 내 검에 묻은 피를 씯어냈다. 나는 내 몸
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삶의 오기와 독기가 빠져나가면서 내 몸은 흩어
져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내 무릎은 흔들거렸고 눈앞이 가물거렸다. 빗물이 자꾸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우는 거야? "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쓰러져 땅바닥에 이마
를 박았다.
자신의 두 손에 가득 화약 가루를 묻힌 채 자폭을 한 강자 선배는 그날 밤까지
살아 있었다. 두목과 은빛 늑대를 잃은 늑대떼들은 성문이 열리자 곱게 빠져 나
갔다. 싸움에서 살아남은 학생들은 홀안 아무 곳에나 드러 누워 숨만 쉬었다.
저학년생들은 청소를 하고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나는 강자 선배를 찾아 갔다. 선배의 얼굴은 문드러지고 곳곳에 기포가 나서
예전의 형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강자 선배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 소리
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방 한구석에다 향로를 놓고 아편을 태웠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던 밀수상
인에게서 보답의 대가로 얻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자 강자
선배는 지글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를 죽여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인간에 의해 죽고 싶어. "
나는 기도문을 외웠다. "이글이글 이 몸을 태우소서, 깨닫지 못한 미몽을 부수
소서. 죽음이 저 멀리 있다고 믿은 내 무지를 때리소서. 낮이 밤으로 바뀌고,
오늘의 태양이 내일의 태양이 아니듯이, 아침의 나비가 저녁의 나비가 아님을
믿지 못한 이 내 몸을 사르소서. "
강자 선배는 뒤척였다. "약자냐? "
"예. "
"너한테 줄 선물이 있다. "
"... "
"나를 죽여라. "
"감당 할 수 없습니다. "
강자 선배는 눈꺼풀 주위의 근육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다행히 사전에 귀마개
를 하고 있어서 청력은 살아 있었지만 시력은 상실되어 나를 볼 수 없었다.
"이상하군. 네 목소리를 들으니 편안해진다. "
"... "
아편 연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 나는 낮게 숨을 쉬었다.
"처음이 어려운 법이야. 나중에는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걸. "
"무슨 말입니까? "
"앞으로 너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거니깐. 연습을 해두라는 거지. "
강자 선배는 웃으려는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
"내 앞에 서 있는 죽음의 사신이 그렇게 말해주는 걸. "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강자 선배는 말했다.
"나중에 나를 위해서 울어줄 수 있어? "
"그건 또 왜요? "
"내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내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난 울지 않았거든. 누구의
죽음에 대해서 울어본 적이 없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참 슬픈 일이야.
"
나는 손사래를 해서 연기를 날려보냈다.
"글쎄요. 생각이 나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