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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과 보응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궁극적 목적과 사랑은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보전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며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대로 백보좌 앞에서 심판과 보응을 받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 후에는 반듯이 심판이 있다. 그러나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심판을 면한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바로 이 생명이다. 우리의 믿음도 이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며 이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이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십자가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구원을 이루셨다.
성경은 말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본받는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어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온전함에 이르도록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궁극적 사랑은 우리를 그분의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사랑과 내적인 그리스도인의는 바로 온전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순종하는 믿음이듯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함은 단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온전함에 이르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명령은 기독교의 궁극적 사랑이며 지고의 선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내적인 의이기도 하다. 원수 사랑의 명령은 육신의 생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자가 되라 하시며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것은 사랑에 온전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즉 원수들까지도 하나님의 자비롭고 포용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의 원수사랑의 명령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과 상호 연관되어 있는 완전한 사랑의 실재로서 하나님의 온전함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이 최고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해와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다. 이러한 주님이 명령이 기독교적 사랑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의 윤리 궤변론자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는 부담을 덜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신들에게 편리하게 왜곡시켰다. 그리하여 레위기 19장의 17-18절의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웃사랑의 명령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율법을 편의대로 뻔뻔하게 곡해 하는지 우리는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기준에서 네 몸과 같이라는 중대한 말을 빼 버리고 그 대상을 이웃의 범주에서 원수를 배제하고 대신 그들을 미워하라는 명령을 추가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좁히며 곡해한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내 형제는 내 동족이며 나와 같은 인종과 종교에 속한 일가친적으로서 그 율법은 이방인과 원수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명령은 오직 내 이웃만 사랑하라는 것이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허가로 심지어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원수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랍비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런 추론을 갖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며 그들 자신의 인종적 편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만큼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만 그럴듯한 합리화이다. 그들은 분명 같은 장 앞부분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 곧 유대인이 아니라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하여 밭과 포도원에 이삭을 남겨 두라는 교훈과 끝장부분의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무시했다. 마찬가지로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는 출애굽기 12장의 말도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원수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지 규정한 다른 명령들에도 눈 감아 버렸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듯이 그 사람에게로 돌리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한 출애춥기 23장의 말씀은 형제의 소나 나귀에 관한 것과 똑 같은 지시가 나와 있다 이것은 그 짐승이 형제에게 속했건 원수에게 속했건 사랑으로 인해 똑같은 것이 요구되었음을 보여준다.
랍비들은 또한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는 잠언서 25장의 가르침을 잘 알았을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가나안 전쟁과 저주 시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전쟁과 시편을 오해한 것이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완전히 타락해 있었다. 그들의 혐오스러운 관행들은 너무나 역겨워서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해 내느니라 고 나와 있다. 실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관행을 따른다면 그들과 똑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우상들에 대항해서 싸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저주시편에 있어서 시편기자는 개인적 적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대표로서 악인을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고 자신을 하나님의 대의에 동일화시킴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원수로 간주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나 다음 순간 하나님께 그를 살피사 그의 마음을 아시며 그를 시험하사 그의 생각을 아셔서 그의 안에 어떤 악함이 있는지 보시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인간적 원한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고 악을 미워하는 그런 순전한 미움이 랍비들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곧 우리 개인의 원수들을 미워해도 된다는 허가로 바꿀 어떤 명분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과 원수에게 서로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 도덕 기준을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추가한 부분을 율법에 대한 엄청난 왜곡이라고 반박하시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다.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예시하시면서 그들의 곡해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이웃이 반듯이 우리와 같은 인종이나 계층 혹은 종교에 속한 사람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이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원수로서 칼이나 총을 들고 우리 뒤를 추적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이웃에는 우리의 원수도 포함된다. 그가 우리의 이웃이 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어려움에 처한 인간이며 우리가 그의 필요를 알고 그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도 그 길을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하신다.
오늘날 세상은 선대하는 자를 멸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는 모델은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자들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친절하시므로 그분의 자녀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타락한 옛 인류의 삶은 대체로 공정한 처리에 근거했다. 손해를 입으면 복수하고 호의에는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인류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복수를 거절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는 바리새적인 정신이 널리 퍼져있다 그것은 복수정신과 편견과 인종차별의 정신이다. 허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수와 차별과 편견을 버리며 우리가 사랑에 부과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편리한 제한들을 버리고 하나님처럼 우리도 모두를 포괄하는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우리가 이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세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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