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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버넌스문제를 운영주체문제로 환원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등급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항상 국가에 의한 검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내재해왔다.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보호”라는 두 가지 사회적 목표 사이의 긴장만이 아니라, 더불어 “검열”이라는 숨은 변수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검열이란 어두운 그림자를 어떻게 지울 것인가”라는 문제는 문화예술인들을 포함하여 시민사회의 일차적 관심사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게임등급시스템은 “자율”이란 화두와 함께 즉각적인 관심사로 부상했다. 자율등급시스템이라면 검열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율등급시스템에 대한 담론은 “누가 등급시스템을 운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띄었다. 자율등급시스템이 검열문제 즉 정부에 의한 타율규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자율규제방식은 운영주체를 정부에서 민간으로 이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단지 등급운영주체를 변경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환원해버린 것이다. 검열문제 해소에 대한 강한 열망이 게임등급시스템의 운영주체가 정부이냐 민간이냐의 문제에 과도하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버넌스 운영주체를 고민하는데 주력한 나머지 정작 거버넌스 형식에 대한 고민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거버넌스 운영주체문제는 거버넌스의 여러 변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적절한 거버넌스 형식이 도출된다면 거버넌스 주체문제는 부차적일 수 있다.
더구나 거버넌스 주체문제 조차도 그다지 엄밀하지 못했다.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민간으로의 이전하는 것만을 주체문제의 전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자율등급시스템에서 거버넌스 주체는 기업과 소비자(또는 시민)을 모두 포함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마치 정부가 운영했던 것을 산업(기업)이 운영하는 것으로 변경하기만 한다면 자율규제가 이루어질 것처럼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정부규제이건 자율규제이건 일정한 통치형식, 통치주체 그리고 통치대상의 설정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었지만 그에 대한 논의 주제들은 운영주체의 문제에 가려져서 수면 위로 부상하지 못했다.
ESRB의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점도 ESRB가 “누구에 의하여 운영 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ESRB가 “어떻게 사회의 안전을 달성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새로운 게임등급시스템은 어떻게 다양한 문화적 기준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 등급기준 설정 및 평가 절차에서 시민참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이 시스템 내에서 정부-기업-소비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와 같은 이질적인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조건과 절차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지난 기간 동안 게임등급시스템의 보수적 회귀 경향은 자율등급시스템 담론이 엄밀하지 못했음을 표지할 뿐만 아니라, 자율등급시스템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지연/김민규/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