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만큼 많이 비판받는 철학자도 드물고, 또 그만큼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도 드물 것입니다.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비판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기여한 바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네요.
“누가 나를 속이도록 해보자, 내가 나를 무엇(something)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남는다; 또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 되도록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남는다” [1]
이 짧은 문장들은 여러 세대 동안 변이합니다. “누가 나를 속이도록 해보자”라는 설정은 튜링테스트의 방법론이 되었습니다. 튜링은 ‘거짓을 말한 능력’을 인공지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삼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들뢰즈가 언급했듯이 영화의 원리로서의 지위를 얻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는 역량이란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게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것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더 길어지므로 생략)
다음으로“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라는 문장은 주체성(subjectivity)의 정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푸코가 언급한 바를 기억해 보면, 가장 폭력적인 권력자 앞에 끌려와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자이더라도 그는 그 상황에 관해서 그 권력자와 다른 해석을 할 역량이 있으므로 그는 주체라고 말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해석을 가진 자만이 주체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자유의 기원적 내용입니다.
마지막 문장,“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 되도록 할 수 없다”는 언명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어떻게 내가 존재했다는 것이 뒤바뀌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진실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수많은 철학자들이 매달립니다. 메를로 퐁티는 시공간적 장이 나의 존재를 압축하고 있으며, 다시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시공간적 장은 주체들에 의해 구성된 형식을 지시합니다. (생략)
이처럼 데카르트는 근대적 주체를 정의하는데 기초적 개념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의 주체가 당위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면, 푸코의 주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체가 될 잠재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 주체이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주체로 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만 합니다. 주체는 언제나 타자들에 의해 구성될 수도 있고 변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긍정적입니다. 주체는 타자 없이는 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타자의 목록 중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국가와 같은 시스템도 주목합니다.
여기서 잠시 이 개념을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1924)”에 대입해봅니다. 김첨지는 돈을 “원수”라고 선언합니다. 김첨지는 현진건이 소환한 현진건의 대리자입니다. 현진건은 한 술 더 떠서, 돈이 스스로도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승인하고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며 일변 돈을 줍는다. 김첨지는 취한 중에도 돈의 거처를 살피는 듯이 눈을 크게 떠서 땅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제 하는 짓이 너무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소스라치자 더욱 성을 내며,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돈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 놓을 놈들 같으니."
하고 치삼이 주워주는 돈을 받아,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팔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돈은 다시 술 끓이는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맞는다는 듯이 쨍하고 울었다.
김첨지에게 있어 돈은 “원수”로 변이했습니다. 돈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었지만 그 이전에는 “원수”라고 불리지는 않았었죠. 그 이전의 돈과 그 이후의 돈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단순히 소설가의 일화적 외침은 아닌 듯합니다. 소설가의 통찰은 사회경제분석가보다 더 예민하니까요.
‘돈’이란 전형적인 인공물입니다. 그것은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발명되었으며 일정한 기능을 하는 훌륭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 자동성을 획득한 존재가 되었죠. 한국에서는 아마도 그것이 1920년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진건이 그것을 ‘원수’라고 부른 그 때!
이제 ‘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돈’이 부여한 질서가 내적 힘을 가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창조자(인간)는 창조물(돈)의 내적 질서 안으로 흡수됩니다. 인간은 ‘돈’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계량받습니다. 단지 ‘돈’의 내적 질서일 뿐인데도 그것이 마치 객관적 질서인 것처럼 믿어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돈’은 자신의 질서가 절대적이고 객관적 질서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 순간 김첨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처지에 놓일 수 있습니다. 즉 김첨지는 그 질서 내에서라면 곧 무효화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래서 김첨지는 ‘돈’을 저주합니다. 좀더 엄밀하게는 ‘돈’으로 상징되는 ‘그것’에 대해서 ‘죽어야할 벌’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 육시를 할 돈!) 김첨지는 문제의 원인이 자신의 무능함이 아니라 ‘돈’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놈’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김첨지의 생각과 ‘돈’의 생각은 상이합니다. 김첨지의 해석은 ‘돈’의 해석과 동일하지 않음에 분명합니다. 김첨지가 욕을 하는 순간, 김첨지는 자신을 무효화시킬지도 모르는 ‘돈’에게 저항하는 독자적 주체입니다. ‘돈’에게 ‘저항’하여 ‘돈’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이더라도. 또는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있더라도.
반대로 ‘돈’은 자기 스스로를 ‘죽어야할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내적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 스스로 무효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흔히 모멘텀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점에서 ‘돈’ 역시 김첨지와 같은 주체의 지위를 이미 획득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무수한 김첨지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무효화되지 않고 자신의 질서(해석)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김첨지는 ‘돈’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돈’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할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진실이라고 간주하므로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에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속일 수 있는 타자입니다. <김지연>
[1] 이 문장은 데카르트의 “성찰(Meditations)”에 등장하는데,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에서 재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