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해: 문자·비문·DB
우리는 서구의 이념들-또는 개념들-을 급격하게 수용했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금융 메카니즘 등등. 거의 모든 것을 기꺼이 수용했는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수용되지 못한 개념들이 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많은 기이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마지막 ‘희망’만은 나오지 못한 것처럼……우리는 그 기이한 것들을 경험했고 동조되었다. 이제 그것들을 다시 상자 안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이미 상자가 열려버렸다면 나머지 것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시간성(temporality)’ 개념은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학자들은 이 개념을 종종 소개해 왔지만 우리 문화 속에 수용되지 못했다. 후설이나 하이데거 그리고 메를로-퐁티, 들뢰즈와 같은 저명한 연구자들의 저작을 통해서도 소개되었으며, 우리는 그 철학자들을 모두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자들의 여타의 개념들은 수용하면서도, 유독 이 개념만은 우리의 사유체계 안으로 스며들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마치 우리 사유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거대한 필터’가 있어서 시간성 개념만은 걸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시간이 마치 화살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시간이 화살처럼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것이라면,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려서 더 이상 없고 현재는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특정하기 어렵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은 ‘붕괴’한다. 라이프니찌가 객관적 세계를 ‘순간의 의식(mens momentanea)’이라고 하는 이유이다[1]. 매번 새로운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간이 될 수 없다. 객관의 세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에게도 현재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노래의 멜로디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매 순간 현재 음만 존재하게 될터인데, 우리가 어떻게 멜로디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멜로디를 들을 수 있고, 누구나 시간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의 관계에서 현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과거’이다. 과거는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과거는 그냥 과거가 아니라 현재 안에 있는 과거이다. 과거는 현재와 묶여있는 과거이고 현재와의 관계에서 현재에 의해 해석되고 기록되고 표지된 과거이다. 미래는 그냥 미래가 아니라 현재 안에 포함된 미래이다. 현재와의 관계에서 현재에 의해 기대되고 지향되는 것, 그렇게 묶여진 것이 미래이다.
멜로디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음과 함께 과거의 음을 현재순간 안에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인 현재는 매 순간 자신의 관점에서 과거를 설정한다. 그리고 약간 미래의 음도 미리 상상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어떤 과거와 미래를 자신 내부에 포함시킬 것인지, 그리고 어떤 관계의 틀로 묶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어떤 과거와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현재화할 것인가? 그것이 시간이다.
짧은 순간의 현재는 곧이어 새로운 현재순간에 의해 밀려나간다. 동시에 새로운 현재는 앞 순간의 현재 전체를 다시 자신의 과거로 삼는다. 앞 순간의 현재안에 포함되어 있던 과거나 미래는 다음 순간의 현재에게는 ‘과거의 과거’이거나 ‘과거의 미래’로 해석된다. 새로운 순간의 현재는 앞순간의 현재를 참조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다시 구성한다. 매순간 시간 전체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시간(또는 기계시간)이 일방향적·선형적 이미지라면 철학적 의미의 시간은 나선적이고 비선형적 이미지이다. 새로운 현재는 이전의 현재를 밀어내면서 이전의 시간 전체를 재구성하는 동시에 압축하면서 도약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렇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생명(life)”이라고 했고, 대부분의 시간연구자들은 “권력(power)”이라고 정의했다.
시간은 구성되는 것이므로, 모든 과거가 시간이 되지는 못한다. 현재에 의해 해석되고 표지된 것만이 과거가 될 수 있다. 당연히 모든 미래도 시간이 되지 못한다. 현재에 의해 기대되고 지향될 수 있는 것만이 미래로 상정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란 특정한 관점(형식)을 전제한다. 특정한 관점과 형식이 있어야만 과거와 미래를 묶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강물과 우리와의 관계를 매순간 총체적으로 묶어내어 현재화하는 우리의 관점(형식)을 전제로 발생한다. 그래서 시간은 단순한 경과가 아니라 매 순간 구성되는 ‘의미’이다.
무엇인가를 현재화할 수 있는 능력, 무엇인가를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힘, 무엇인가를 현재와의 관계 아래에 묶어놓을 수 있는 관점과 형식이 시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러한 시간의 구성에 언제나 개입한다. 특히 인간의 기술은 시간구성에 개입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모든 기술은 시간에 개입하며 시간을 변형시킨다. 문자와 비문과 데이터베이스(DB)를 보자.
우리는 회의를 한 후, 그 회의록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참여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경함을 느끼게 된다. 당시의 상황맥락은 모두 생략되고 단지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들만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회의록은 그 상황으로부터 베어낸 어떤 부분들을 재배치하여 독자성을 가진 구조물이 된다. 이제 그 회의록은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다. 회의록을 보유한 자는 회의에 참석한 자만큼이나 그 회의상황을 즉각적으로 호출할 수 있다. 회의록은 자신의 방식으로 과거를 압축하고 있는 현재이다.
사실 문자가 된 말들은 상당히 빈약하고 초라하다. 이미 플라톤은 문자의 빈약함을 비판한 바 있다. 게다가 문자는 전달하는 것을 변형시키기까지 한다. 더 쉽게 문자로 전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문자로 전환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대체로 논리적이거나 정량적인 것들은 더 쉽게 문자화될 수 있고, 반면에 직관이나 감정 같은 맥락적인 것들은 문자화되기 어렵다. 논리적이고 정량적인 것들은 더 쉽게 문자화될 수 있기 때문에, 맥락적인 것들 보다 더 많이 문자화된다. 그래서 정량적인 것들이 맥락적인 것을 대체하게 된다. 정량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이 나머지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나머지가 있었다는 것도 잊는다.
문자의 상대적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술보다 문자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한다. 구술과 문자가 경합하는 경우 언제나 문자의 진실성을 더 믿게 된다. 구술과 달리 문자는 체화된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문자가 된 것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자신의 방식으로 과거의 것을 ‘생생하게’ 현재화한다. 문자가 된 것은 ‘진실’이며 ‘실재’가 된다. 그래서 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권력이 된다. (그런 점에서 한글창제는 매우 비상한 사건이다. 기술사에서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가!)
오래된 비문을 본 적이 있다면 비문 표면의 글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에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천년을 지나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비문에는 균열들이 있다. 그런데도 글자 하나하나는 마치 지금 막 파낸 듯하다. 탑비 표면을 빼곡하게 글자들이 가득하다. 저자가 새겨넣은 내용들이 마치 그 시대 전체를 대변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듯이 우리 앞에 마주서 있다.

<그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비문의 글자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저자는 매우 심각하게 그 내용들을 추리고 추려서 비문을 작성하였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커다란 비문을 축조하려면 매우 많은 공력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비문은 저자에 의해 선택된 것들을 체화함으로써 그것들을 현재화하고 있다. 비문은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이 존재했음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는 비문이 담고 있는 시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비문의 존재는 현재이며, 그 현재 안에 자신만의 형식(구조)로 자신의 과거를 포함하고 있다. 동시에 비문의 저자가 기대했던 미래도 담고 있다. 그렇게 비문은 두터운 시간을 압축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비문을 통해 시간은 변형된다.
오늘날 데이터베이스(DB)는 어떠한가? 점점 더 많은 정보들이 DB화 되고 있다. 우리 개별에 대한 정보는 데이터가 되어 일정한 형식으로 저장되며 언제든지 특정한 형식으로 호출될 수 있다. 다수의 행정정보시스템이 보관하고 있는 정보들과 의료정보, 금융정보 등을 모을 수 있다면 ‘나’를 재구성할 수 있다. 그 데이터들은 나를 대변하는 아바타다. 나는 여기 있지만 공식적으로 평가되는 ‘나’는 그러한 데이터들로 구성된 ‘나’이다. 여기 있는 나도 ‘나’이며 거기 데이터로 구성된 나도 ‘나’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데이터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관측된 ‘나’이며 그 값들은 강한 관계들로 묶여서 현재화된다. 여기 있는 육체를 가진 나만큼이나, 데이터로 구성된 '나'는 강력한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더 강력할 것이다. 나는 특정한 위치에만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호출될 수 있다. 그리고 나보다 그 데이터적인 '나'가 더 오래 보존될 것이므로 나의 사후에도 데이터시스템들 내에서 ‘나’는 정보값들로 계속 현재화될 것이다. 기술은 시간을 구성하는데 이미 참여하고 있다.
설명이 너무나 부족하다. 시간성 개념에 대한 주목을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김지연>
[1] Merleau-Ponty, M. 1962,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by Colins Smith, Routledge & Kegan Paul. [메를로-퐁티, 류의근 옮김, 2008,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지성사]
[2] 소광희. 2001.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