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확실성(Uncertainty)”이란 무엇인가
불확실성 개념은 포스트모던시대를 대표하는 단어이며. 흔히 사용되는
개념이다. 위키피이아에서는 이것을 “확실성의 결핍”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부언하면 “지식의
한계로 인하여 현존하는 상태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미래 결과를 정확히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라거나 하나 이상의 결과를 가지는 상태”이다.
상식적으로 세계는 더 복잡해졌고 따라서 예측 불가능해졌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단지 복잡해졌다는 것이 불확실성 개념인가? 불확실성이란 우리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승인하는 것이다. 미래에 인간의 역량이 성장하더라도 도저히 확증할 수 없는 상태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는가? 만약 단지 세계가 복잡하기만 하다면, 인간의 기술역량이 계속 성장할 것을 고려한다면 논리적으로 언젠가는 완전한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지식(이해)이 확실한 것인지 불확실한 것인지는 미래에 위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해가능성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불확실성 상태임을 미리 단정하게 되었는가? 최근 과학기술의 역량이 급격히 증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인간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불확실성 원리(The principle of uncertainty)는 1927년 일련의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로 부터 기원한다고 본다(이것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우리가 전자와 같은 입자를 관찰할 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관찰대상에 영향을 주어 관찰대상의 상태를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전자를 본다는 것은 그 전자에 빛(에너지)을 쏘아서 그 전자가 튀어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튀어오르는 전자의 빛을 감지함으로써 그 전자를 관측한다.
그런데 그 전자가 튀어올랐다는 것은 한번의 양자도약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관찰대상을 관측하기 위해서 관찰대상을 관측가능한 상태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 이전의 원래 관찰대상이 어떤 상태였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 즉,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 그 오차범위는 플랑크 상수값(6.6260755×10-34J·s)보다 적다. 그러니까 사실은 엄청나게 정확해진 것이다~ 10-34는 매우 미세한 값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확도가 이전보다 높아졌다는데 초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 이하로 부정확도를 줄일 수 없다는데 방점을 두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1961년 클라우스 욘손(Claus Jonsson)에 의해 “이중슬릿실험”으로 입증되었다. 이 실험은 과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10개 안에 드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의 인식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실험과학이 입증할 수 있었다니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세계만이 아니라 거시계계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다만 그 오차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물리법칙의 기술도 거의 근접하다고 본다.
불확정성 원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관찰한 내용(지식) 안에는 우리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관측된 전자”는 인간(과학자)이 쏘아보낸 빛에너지의 영향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빛을 쏘아보내는 인간의 의도(입자의 속도를 측정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고자 하는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전자의 잔해가 뿌려진 형광스크린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실험실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붉은 꽃을 보고 재잘거리는 새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그 꽃을 “붉다”고 하고 그 새가 “재잘거린다”고 안다. 그 관찰의 내용(꽃과 새에 대한 지식)은 관찰대상에게만 귀속된 성질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는 눈과 그렇게 해석하는 뇌와 그렇게 느끼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찰한 내용 안에는 우리자신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박쥐라면 우리와 전혀 다르게 감지할 것이다. (우리는 박쥐가 초음파를 사용한다는 것만 알 뿐 어떻게 세상을 감지하는지 알 수는 없다) 박쥐가 포착한 관찰내용(세계에 대한 지식)안에는 박쥐자신이 포함되어 있다. 박쥐가 그렇게 듣는 귀(?)와 그렇게 해석하는 뇌와 그렇게 느끼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쥐가 되지 않는다면 박쥐처럼 느낄 수 없다. 박쥐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갈망하지만, 불가피하게 우리가 아는 세계(관찰내용)란 우리자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다수이다라는 점으로 유도된다. 물론 우리의 도덕과 성찰을 전제한 범위내에서 그렇다. <김지연>

--
메일링리스트에 가입하려면, spri...@google.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또는 구글그룹스에서 '게임 거버넌스'를 검색하여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메일을 포스팅하려면, game_go...@googlegroups.com으로 메일을 보내세요.
---
Google 그룹스 '게임_거버넌스' 그룹에 가입했으므로 본 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
이 그룹에서 탈퇴하고 더 이상 이메일을 받지 않으려면 game_governan...@googlegroups.com에 이메일을 보내세요.
이 그룹에 게시하려면 game_go...@googlegroups.com(으)로 이메일을 보내세요.
http://groups.google.com/group/game_governance?hl=ko에서 그룹을 방문하세요.
더 많은 옵션을 보려면 https://groups.google.com/groups/opt_out을(를) 방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