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근 동작 희망나눔네트워크 사무국장의 페북 메시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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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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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 2013, 12:11:12 PM7/2/13
to 해방촌 메일링

 

 

그전에 강의 나  인터뷰 기사 등에서   이미  들어봤던  내용이지만...

다시  정리 해서 페북에 올려 주셨길래    스크랩 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성대골 사람들은 ..

 

<해방촌 사람들>의  롤 모델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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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_'몬드라곤에서 배우자'와의 조우!
난 답답하거나 삶이 무료해질때면 학교앞 사회과학서점 <글사랑>을 습관처럼 뒤졌다. 신간보다 오래된 책을 위주로 골랐다. 그때 발견한 책이 바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였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흔쾌히 무언가를 나의 길이라고 말하기 힘든 그때 몬드라곤은 내게 이상이자 대안이었다! 너무 좋은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했으나 그냥 무시...ㅠ 어느새 몬드라곤은 기억속으로 묻혀갔지만 내게 공동체에대한 꿈은 그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2. 2000_지역공동체를 꿈꾸다!
'학생운동은 학생이 해야한다'는 신념하에 학생운동을 5년만에 정리하고 사회진출을 고민하다. 막연하나마 몬드라곤에서 출발한 꿈은 '공동체 연구'로 이어졌다. 
마침 정외과인 나는 졸업논문 주제를 '정치소외 극복방안으로서의 지역소공동체 운동에 관한 고찰'로 정했다. 당시 지도교수를 누구로 해야할지 막연했다는 조교선배의 전언도 있었다.(물론 아직 난 졸업 논문을 쓰지 않았고 졸업도 하지 못했다.)
인터넷, 영풍, 교보를 뒤지고 뒤져 10여권의 책을 샀다. 불과 10여년적이지만 당시만해도 우리사회는 공동체라는 두리뭉실한 개념에 관심이 없었다. 몇날 몇일을 투자해 건진 책이 10여권 뿐이었고 그나마 상당수는 출간된지 오래 되었거나, 농촌, 종교 공동체에 대한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기에 '도시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너무 거창하다. 박사논문쓰냐?'며 비아냥도 많이들었다. 그러나 난 그것이 현시대에 가장 적확한 해답이라 생각했고 혼자 길을 모색했다.

3. 2004_희망동네를 만들다!
책도 읽고, 중간에는 민노당 동작구 위원회에서 상근도 했다. 그러나 늘 목이 말랐다. 그래서 과감히 모든걸 접고 희망동네라는 풀뿌리시민단체를 만들었다. 당시 29세, 무모했고, 용감했다. 돌이켜보니 부족함도 많았고 아쉬움도 만았다. 그러나 당시의 결정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10번 고민하는 것보다 한번 실천하는게 낫다는게 내 철칙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생문이 열렸다. 내 급여는 무일푼인적도 많았고 많을때가 50만원이었다. 그나마 사람을 쓰면 내급여는 다시 0 이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늘 내 모든걸 내주고 데려온 상근자는 내 뒤통수를 치곤했다. 힘든 일이기에 작은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건 알지만 그냥 혼자 일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혼자 일하면 속도 편하고, 작지만 급여라도 나오니 말이다.

4. 2008_모든걸 걸다!
일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일도 있는 법!
그러나 알면서도 당시엔 견디기가 참 힘들다. 게다가 나쁜일은 몰아서 오는법. 
집안사정으로 돈이 필요해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아침11시에 사무실 나가 일보고 동네 돌아다니다가 저녁 7시부터 새벽 5~6시에 집에 들어왔다. 평균 수면시간 4시간...그렇게 7개월을 일했다. 집안의 급한불은 끌 수 있었지만 몸도 망가지고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도저히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했다. 
"1년간 다 걸고 최선을 다 해보고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이 바닦을 뜨겠다."고...그러니 도와달라고...족히 20여명은 찾아 다닌것 같다. 재미난 사실은 나는 정말 몸을 불사르는 각오로 열심히 해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떠날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5. 2009_희망의 발견
1년 여를 박박기며 고생한 결과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동작구공부방협의회가 만들어졌다. 3년간 공을들여 얻은 결실이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려애썼다. 처음엔 잡상인 취급까지 당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연락을 취했고 10개 기관이 모여 동작구공부방협의회를 만들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자립, 연대, 나눔의 원칙을 함께 만들고 지켜온 공부방원장님들은 지금까지 나의 지역운동에 가장 큰 보물이자 선물이다.

6. 2010_직접행동을 시작하다.
2009년까지 희망동네의 활동은 네트워크 위주였다. 원체부족했던 동작구의 지역자원을 발굴하고 연계하는데 집중했다. 여기서 희망동네의 원칙은 '내 것을 챙기지 말자'였다. 대부분의 경우 네트워크는 속된말로 얻어먹을게 있어야 유지되어 왔다. 서로 무엇을 얻어갈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네트워크가 제대로 유지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네트워크를 제안하는 우리부터 '가장많이 고생하고 가장적게 가져가자'라는 원칙으로 활동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는 활성화 되어갔지만 정작 사람들을 희망동네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헷갈려했다. 사실 이때까지 희망동네는 무형의 자산이었다. 그냥 필요한일은 다했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같은 역할만으로는 부족한 시점이 왔다. 희망동네의 회원사업, 직접사업을 준비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잡은 아이템이 '우리동네작은어린이도서관만들기'였다. 
아름다운가게에서 1500만원 지원을받아 1년동안 동네에서 사업을해 겨우 5명정도의 주민을 모았다. 말도 안되는 성과였다. 그래도 아름다운가게는 그 부족함을 인정해줬다. 그렇게 상도 3, 4동 모임과 대방동 모임이 만들어졌다. 동네에서 도서관을 만들자며 별짓을 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큰둥했다. 만드는 과정에 추진위원간 갈등도 많았고, 심지어 개관을 앞두고 책사러가서는 심한싸움이 나기도 했다. 도서관 계약을 앞두고는 '말려야 한다.'며 2명이모여 비상 회의까지 했다고 한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날 일일호프를 하기도 했다. 희망동네의 모든 활동의 자원을 충동원했다. 그렇게 10개월만에 2,000여만원을 모았고 2010년 10월 <성대골어린이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이듬해인 2011년 12월에는 비슷한과정을 거쳐 두번째 도서관인 <대방해맑은어린이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많은 3,000여만원을 모았다. 그리고 올해 2월 3호도서관인 <까망돌어린이도서관>이 흑석동에 문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지역주민을 만나며 단맛, 쓴맛을 경험하고 있다. 

7. 2010_또다른 도전, 협동조합!
협동조합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글이 희망동네 역사를 돌아보는 글이 되었다. 사실 쓰다보니 길어지게 된데에는 두가지 정도의 노림수(?)가 있다. 첫번째 노림수는 올해처음 희망동네에서 일하게된 식구들에게 희망동네가 살아온길을 알리기 위함이다. 붙들어놓고 이야기하면 잔소리밖에 안되니 글로 대신 전하고자 함이고, 두번째 노림수는 이번에 1인출판사를 차린다는 선배가 내 이야기로 책을 한권 내자고 해 정리한김에 요약본삼아 보내보기 위함이다. 사실 '아직은 때가아니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이전부터 신세진것도 많고 그 선배의 실럭에 대한 믿음도 있는데다 마침 딜할것도 생겨 이 글을 복사해 보내볼 요량이다. 
아무튼 본론으로돌아와 나는 10 여년의 구상끝에 협동조합을 실천하기로했다. 2005년 1년여의 수감기간동안 내가 메모한 것들의 대부분은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 구축이었다. 
어려서부터 셈에 빠른 편이었던 나는 무엇을 보던 사업적으로 계산하고, 구상하는건 좋아했다. 돈에 욕심이 많은편은 아니었지만 돈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었다.
게다가 일찌감치 '정부지원금은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단체사정은 늘 어려웠고, 자연스레 10여년전 시작된 협동조합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으로 이어졌다. 
솔직하게 시작은 무모했다. 2009년은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기 2년여전이었고,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협동조합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대부분 부정적 반응이었고 2년간의 설득 끝에 출자자를 모아 2010년 12월 협동조합 1호점 <마을카페 사이시옷>의 문을 열었다. 이어 2011년 3월에 2호점 <성대골별난공작소>가 2012년 6월 3호점 <우리동네마을상담센터>, 2013년에는 1월에 4호점 <우리모여청소년센터>, 4월 5호점 <노나매기 단체급식협동조합>까지 문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희망동네에는 법인상근자 4명, 협동조합 상근자 7명에 파트타임 7명등 20명가까이가 일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와같은 성장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든든한 기반과 힘든시기 한눈팔지 않고 제길을 묵묵히지켜왔음이 밑거름이 되어왔으리라 생각한다.

이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페북 이곳 저곳에서 '협동조합'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리니 걱정되어서였다. 휴대폰으로 쓰다보니 앞의 내용을 보기가 힘들어 논지가 오락가락 하기는 했지만 불과 2년전 아무런 관심도 없던 이들이 협도조합으로 무언가를 해보자고해도 거들떠도 안보던 이들이 갑자기 협동조합이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양 떠드는데에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드는게 사실이다.

협동조합은 많은 시련과 인내 그리고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보물이다. 마치 된장같다. 지금은 유행처럼번져 공장에서 찍어내는 협동조합이 늘고 있지만 그 유행이 사그러들고나면 사람들은 떠나고 묵은된장같은 협동조합만 남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더많은 사람들이 이 묵은 된장의 행렬에 동참하길 바라며, 나 역시 그럴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끝....내가 쓰고도 징하게 썼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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